임원 보수 문제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미국은 81년의 시차가 난다. 미국식 자본주의 가치와 제도를 발 빠르게 수입해온 풍토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기업 임원의 보수 공개 수준은 미국에 견줘 크게 뒤떨어져 있다.
미국은 이미 1933년부터 임원 보수를 공개해왔다. 대공황을 겪고 자본시장을 정비하면서 만들어진 제도 중 하나였다. 당시 증권거래법에 따라 연봉 2만5000달러가 넘는 임원의 보수는 모두 공개하도록 했다. 기업인들의 비판이 거셌지만, 큰 반대 없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듬해 개정된 증권거래법은 상장사 임원 보수가 2만달러가 넘는 경우, 공시 서식에 따라 보수 총액을 공개하도록 했다. 미국 임원 보수 제도를 연구해온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이 일찍부터 임원 보수를 공시한 것은 회사 경영을 투명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데다 주주와 사회가 기업 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장치로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원과 직원 간 보수 격차가 가장 큰 나라로 꼽히는 미국이지만, 임원 보수를 투명하게 드러내려는 제도와 문화는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 “회사경영 투명화 위해”
연 2만달러 이상 받는 임원
총액·세부내역까지 공시
누리집서 누구든 볼 수 있어
국내 “노사간 위화감 조성 탓”
임원보수 뭉뚱그려 총액 공시
CEO 등 얼마 받는지 가늠못해
최근에야 개별공시 법안 통과
우리나라에 ‘통상임금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니얼 애커슨 지엠(GM) 회장이 지난해 보수를 얼마나 받았는지는 전세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지엠의 누리집에 공시된 보고서를 보면, 애커슨 회장은 지난해 총 1110만달러(약 123억원)의 보수를 챙겼다. 그의 보수는 기본급(salary)과 주식 교부(stock awards), 기타 다른 보상액(특전 및 보험 혜택 등) 등으로 구성됐다. 이지수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미국 변호사)은 최근 한 보고서에서 “(미국에서) 임원 보수는 회사의 주요한 정보이기 때문에 주주들에게 시의적절하면서 충실히 공시되어야 할 사항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모든 상장사의 핵심 임원은 7가지 항목에 따라 보수의 세부 내역과 총액을 공시하는 것이 의무다.
국내로 눈을 돌리면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 가운데 하나인 현대자동차 누리집에 들어가 지난해 사업보고서를 열어보면, 임원 보수 정보는 사내이사 4명에게 1인당 평균 22억9900만원씩 91억9600만원의 보수를 지급했다는 내용이 전부다. 사내이사가 누군지 확인하려면, 다시 ‘임원 및 직원의 현황’이란 항목에 들어가야 정몽구 회장과 아들 정의선 부회장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총액을 인원수로 나눈 1인당 평균값 이외에 정 회장이 지난해 연봉으로 얼마를 받아갔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국내 다른 상장사도 마찬가지다. 13일 <한겨레>가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700개가 넘는 기업의 사업보고서를 모두 확인했으나, 임원의 개별 보수가 공개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찾을 수 없었다. 또 유가증권시장에 1998~2012년 계속 상장된 457개 기업의 지난 15년치 사업보고서(약 7000개)에서도 임원 개별 보수 공시는 고작 3~4건 발견되는 데 그쳤다. 금호산업은 2000년 사업보고서에서 박성용 당시 명예회장의 보수 2억3216만원을 비롯해 사내외 이사와 감사 16명의 개별 보수를 공시했다. 하지만 이마저 일회성에 그쳤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임원 보수 공시는 ‘자율’이란 이름 아래 오랫동안 방치돼 왔으며, 공시가 의무화한 이후에도 실효성 없는 ‘무늬만 공시’였다. <한겨레>가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임원 보수 관련 공시서식기준 개정 연혁’을 보면, 2004년 증권거래법(현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임원 보수총액 공시 의무가 도입되기 이전에도 자율 기재가 이뤄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까지 회장, 부회장, 사장 등 사내이사의 보수가 사외이사 및 감사 등과 구분 없이 임원 보수 총액으로 묶여 기재되는 이른바 ‘물타기 공시’가 태반이었다. 이후 사내이사, 사외이사와 감사로 정확히 구분돼 공시되는 비율이 계속 늘어났지만, 지금까지도 최고경영자(CEO) 1인의 보수는 수수께끼처럼 ‘1인당 평균값’에 숨어 있다.
임원 개인별로 보수를 공시할 필요성이 제기돼 왔지만 번번이 자본 쪽 논리에 막혀 좌절됐다. 심상정 의원(정의당)과 이정희 전 의원(통합진보당)은 각각 2006년과 2009년에 개별 임원의 보수 공개를 추진하는 증권거래법과 자본시장법 개정 법률안을 제출했다. 취지는 보수 결정을 좌우하는 지배주주로부터 임원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지배주주가 임원 보수 명목으로 ‘우회 배당’을 하는 것을 막고, 보수의 적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재계 이해를 대변해온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임원과 직원 간 보수격차 공개에 따른 “직장 내 위화감 조성”, “노사갈등 심화” 등을 들어 강하게 반대했다. 지난 7년, 더 길게는 임원 보수를 처음 공시한 이후 올해 4월까지는 ‘자본’의 승리였다. 이 질긴 싸움 끝에 이목희 의원(민주당)이 다시 발의한 법안은 경제민주화 흐름을 타고서 지난 4월 말 국회를 통과했다.
임원 보수를 기업의 투명성을 보여주는 척도 가운데 하나라고 할 때 우리나라 기업들의 투명성은 아직 낮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일에 가려진 고액 보수는 종종 기업의 비자금 조성 통로로 쓰였다가 들통나기도 했다. 내년부터 상장사를 포함한 사업보고서 제출 대상 법인의 개별 임원의 보수가 공개되지만 시작에 불과하다. 김기식 의원(민주당)은 “연봉 5억원 이상 등기임원으로 제한된 공개 대상의 연봉 하한을 낮추고, 등기임원이 아니더라도 회사 경영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는 임원에 대한 보수까지 확대 공개돼야 한다”고 말했다.
류이근 김경락 기자
ryuyige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