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농부다] 윤형근의 모심과 살림
국내 유수의 한 결혼정보회사가 유언 수행 서비스를 시작했다. 돌아가신 분이 남긴 유언이라면 당연히 가족들이 받들어야 하건만, 고인이 믿을 만한, 고인과 함께할 가족이 더 이상 없는 것일까.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유품정리인’이 몇 해 전부터 성행하는 직업이 되었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가족공동체마저 해체되어 2011년에만 3만2000여명의 노인이 ‘고독사’했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은 일본의 이런 현실을 인연이 끊긴 사회, ‘무연사회’(無緣社會)라고 규정한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일본보다 나을 게 없다. 1인 가구가 전체의 4분의 1을 넘어섰고, 혼자 사는 노인만 120만명에 이른다. 2009년 통계로는, 노인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독보적인 1위다. 75살 미만 노인 자살률은 일본의 4배, 75살 이상은 무려 10배 이상이다. 돈 말고는 기댈 곳이 없는 노인들이 대통령의 기초연금 공약 파기에 분노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유언 수행 서비스도 이런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복지제도를 강화하고 돌봄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는 일은 고령사회를 눈앞에 둔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다. 하지만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만들고 온기를 불어넣어 지역공동체를 재생하는 일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그런 움직임이 보인다.
서울 중랑구에서 아파트 공동체의 사회적 협동조합을 세운 강경로 이사장에게는 꿈이 있다. 입찰 비리를 근절해 아파트 관리비를 아끼고 품질 좋은 생필품을 저렴하게 공동구입하면서 마을공동체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가장 큰 소망은 협동조합의 운영수익으로 동네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요구르트를 배달하고 말벗이 되어드리는 일이다. 요구르트 배달은 강 이사장이 몇 해 동안 봉사활동으로 해왔지만, 언젠가부터 재원 부족으로 중단하게 됐다.
경기도 성남에는 ‘효순이효식이’라는 사회적 기업이 있다. 시간 여유 있는 동네 주민들이 효순이와 효식이가 되어 노인들을 병원에 모시고 가거나 짬을 내어 돌보는 사업체다. 아파트 경비원, 건물관리인의 협동조합이나 원주의 노인생협처럼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협동조합도 여럿 눈에 띈다. 기댈 곳 없는 노인들이 서로 의지해 함께 일자리를 만들고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희망제작소에서는 오래전부터 퇴직자들의 전문성을 사회적으로 필요한 영역에 연결하는 사업을 해왔다. 앞으로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는 은퇴자들의 경험과 지혜, 전문성이 굉장히 중요한 쓰임새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사업을 하는 사회적 경제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또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가 지역공동체를 재생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과 같은 경제대국의 미래가 무연사회, 일본이 자랑하던 회사인간의 끝이 고독사라면, 물질적 풍요만을 목표로 돈이 관계를 대신하게 된 우리 사회의 내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일의 황혼을 준비하며 오늘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경제적 빈곤이나 사회적 외로움을 헤쳐 나갈 사람들의 관계망, 지역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다.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면서도 이웃과 체온을 주고받을 수 있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이 만드는 지역공동체가 고령사회 문제의 해법이 될 것이다.
윤형근 한살림성남용인생협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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