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7일 포스코 등 10여개 철강회사 임원들이 모여 우울한 얼굴로 ‘철강업종 민간협의회’를 열었다. 외환위기 이후 17년 만에 다시 열린 모임이라고 한다. 세계 5위의 한국 철강산업은 엄습해온 수요침체와 공급과잉 속에 지난 몇년간 수익성 악화를 좀체 면치 못하고 있다. ‘내년에는 좀 나아지겠지’는 헛된 기대였음이 명징해지고 있다. 위기감 속에 열린 민간협의회는 ‘식어가는 용광로’가 일시적 경기순환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구조적 추세로 굳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자리였다.
바야흐로 ‘손실의 계절’이다. 추세·방향·속도·폭 모든 측면에서 주요 산업의 지표들이 하강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산업의 쌀이자 등뼈인 철강만이 아니다. ‘세계 1위’ 조선, ‘세계 최고의 휘발유 품질’ 석유화학 같은 우리 산업의 근골격도 번영의 시절이 끝나고 혼돈에 빠져 있다. 손실을 감추려고 회계장부의 예술(분식회계)을 동원해 얼굴 화장에 애쓰는 조선업 풍경은 차라리 안타깝다. 중추 산업들이 겪는 불임은, 전후방에 걸쳐 여기에 의탁해 살아가는 경제활동인구 2630만명을 다시 좌절에 빠뜨린다.
누구든 기업과 무관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법인세를 납부한 우리나라 전체 영리법인은 50만6천개(총매출액 4131조원·2013년)에 이른다. 여기서 관심은 수치가 아니다. 흔히 “사악한 회사보다 더 나쁜 건 ‘무능한’ 회사”라고 말한다. 고용도 생산효율성도 생산량도 아닌 오직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기업엔 ‘유능’이 가장 중요할 터다. 하지만 우리 역시 복리의 마법으로 커가는 성장지표들에 현혹된 채 때로는 불평등까지 정당화해왔다. 소득 불균등 분포의 한쪽에 거대한 규모로 웅크린 ‘시장 열패자들’의 삶은 가공할 빚(가계부채 1130조원)으로 이어진다. 경제에서 고소득·부유층의 자산은 금융중개기관을 거쳐 저소득층의 빚이 된다. 빚은 본질적 특성상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빚에 허덕이다 보면 소비는 곧 멈춘다.
지금 통과하고 있는 손실의 시기는 여러 영역을 관통하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질병’에 한국 경제가 맞닥뜨리고 있다는 생각을 한층 확고하게 해준다. 무릇 생산·소비 과정의 이윤획득 원리가 원활하게 작동하려면 소득 균등화 같은 ‘사회적’ 수준의 협력·지원이 필요하다. 이는 시대의 요청이다. 그러나 이 지원 기반은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다. 철강산업을 위시해 건축물 층수만 높이며 자꾸 확장해온 한국 경제는 그런 점에서 사회와 불화해왔다. 그 질병은 어쩌면 ‘성장의 사회적 한계’이며 경제에 대한 ‘사회의 복수’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지 모른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꼬이고 모호해 보일수록 ‘이윤·생산함수’를 들여다보면 사태와 현상이 간명하게 드러난다.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시절엔 산업협회마다 담합과 우애를 발휘해 ‘집합적 일체’(이익)를 도모했다. 외견상 치열한 시장경쟁이 벌어지는 듯하지만, 사실은 자본력을 앞세운 덩치 큰 놈들이 시장에 끼어들어와 판을 깨고 이윤을 장악했다. 기업들은 오히려 국가의 제도적 규제를 즐겼다. 규제가 자신들을 경쟁으로부터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동맹은 깨졌고 ‘살아남는 기업이 강한 자’다. 도피처는 없다. 닥쳐온 불황기에 이윤 극대화의 길은 오직 비용 극소화뿐이다. 임금피크제와 쉬운 해고를 향한 기업의 공세는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또 힘없는 하청업체에 손실을 전가하려는 기회주의적 ‘경쟁’만이 격화된다. 흔히 ‘압축’으로 표현돼온 한국 경제 생산함수는 시간의 압축성뿐 아니라 생산요소의 물적 압축 투입(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의존했다. 산업화 시대 이래 낡고 유통기한이 지난 생산함수는 여전히 끈질기다. 그 유산은 ‘손실의 계절’로 돌아오고 있다.
조계완 경제부 산업2팀장 kyewan@hani.co.kr
조계완 경제부 산업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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