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추석은 상인들이 큰 돈을 벌 수 있는 대목으로 묘사된다. 아마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추석은 대목이었을 것이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정부가 15일 국무회의에서 발표한 ‘추석 민생대책’은 의아스럽다.
민생대책의 첫 꼭지 ‘코리아 그랜드세일 붐 확산으로 활기찬 명절’의 세부 내용을 보면 300개 전통시장이 추석 연휴 전날까지 최대 50%까지 세일을 한다고 적혀있다. 추석 대목에 평소보다 싸게 장을 볼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시장 중 하나인 광장시장의 단골 생선가게 주인에게 ‘그랜드 세일’에 대해 물었다. 생선가게 주인은 “그거 뭔지 잘 모르겠다. 우리랑 상관없는 거다. 할인 같은 거 안한다. 추석에 웬 할인이냐?”고 되물었다.
민생대책에는 전국 2141개 농·수협·산림조합마트도 코리아그랜드세일에 동참해 성수품과 선물세트를 10~35% 세일한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세일’이라고 하면 원래 정가가 정해져있는 것을 한시적으로 싸게 판매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유통업계에서는 수시로 가격이 변할 수 밖에 없는 농수산물에 대해서는 ‘세일’이라는 개념을 잘 쓰지 않는다. 10~35% 세일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농식품부에 물었더니, “생산자 단체들이 시중가에 비해 10~35% 싸게 팔기로 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중가는 뭘 기준으로 한 것이냐 물었더니, 생산자 단체들이 조사한 가격으로 농식품부가 자료를 받아본 것은 아니라고 했다.
민생대책에서 진짜 세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백화점 세일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여러 백화점들의 세일을 ‘코리아 그랜드세일’이라는 통일브랜드로 실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원래 백화점들은 10월이면 일제히 가을 정기세일에 들어간다. 그런지 20년이 넘었다. 굳이 통일 브랜드를 사용하지 않아도 이즈음 모든 백화점이 세일을 한다는 것은 상식이 됐다. 정부는 모든 백화점들이 같은 이름을 걸고 세일을 하면 붐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경기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에 무능한 정부가 민간 기업들의 세일 행사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숟가락을 얹더라도 얌전히 얹으면 민폐는 덜할 것이다. 정부가 지난주 주요 백화점 임원들을 불러모아 코리아 그랜드세일 동참을 압박하자 백화점들은 10월1일로 예정돼 있던 정기세일 시작일을 9월25일 또는 28일로 3~6일씩 앞당겼다. 이때문에 백화점마다 홍보물을 수정하고 추석 전후 근무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한 대형 백화점 직원은 “직원들이 추석행사 뒤 숨돌릴 틈도 없이 세일 준비에 들어가게 생겼다. 연휴에 거의 쉬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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