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직접출자’ 피했지만…
‘자본확충펀드 10조’ 시한 못박아
금통위 사후추인 논란 불거질듯
‘자본확충펀드 10조’ 시한 못박아
금통위 사후추인 논란 불거질듯
한국은행이 정부와 오랜 ‘밀당’ 끝에 국책은행 자본확충 방안에 합의했으나, 독립적 의사결정을 해야 할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가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뒷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됐다. 한은이 최대 10조원의 돈을 찍어 내주기로 했지만, 이런 내용이 금통위 의결도 거치지 않은 채 정부와 한은 집행부 간 합의로 사전에 정해지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8일 발표된 ‘국책은행 자본확충 방안’을 보면, 금통위 의결을 거쳐야 할 발권력 동원과 관련한 내용이 적지 않다. 한은은 최대 10조원의 돈을 대출 형태로 자본확충펀드(펀드)에 내주는 것은 물론 7월1일까지 펀드 준비를 마치기로 했다. 금통위의 의결을 거쳐야 할 내용을 시한까지 못박아 발표한 건 ‘사후 추인 논란’을 부를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법은 통화신용정책을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금통위가 독립적으로 의결하게 돼 있다. 한은 집행부 수장인 총재와 부총재는 당연직 금통위원이지만, 이들은 정부 부처와 달리 포괄적 권한을 갖고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이에 대해 한은 관계자는 “이는 당장의 실행계획이 아니라, 만약을 대비한 컨틴전시플랜(비상계획)이란 취지이고, 금통위원들에게 중간보고를 해서 공감대도 얻은 상태”라면서도 “어느 정도 한계는 있다”고 털어놨다.
게다가 한은이 돈을 내줄 펀드의 복잡성은 이른바 ‘우회로’의 한계와 난맥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정부가 국회를 거쳐 재정으로 국책은행에 직접 출자를 했으면 이런 복잡다단한 펀드 설계가 필요치 않다. 하지만 이를 피하려다 보니 이런저런 법적 제한을 빠져나가느라 아이비케이(IBK)기업은행,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신용보증기금(신보) 등이 뒤얽혀 들어간다.
먼저 정부는 자신이 최대주주인 기업은행에 1조원을 현물출자하고, 기업은행은 늘어난 자본금을 토대로 1조원을 캠코에 대출해준다. 캠코는 이 돈으로 일종의 특수목적법인(SPC)인 펀드를 설립해 운영 책임 등을 맡는다. 캠코가 만든 이 펀드에 한은이 기업은행을 통해 최대 10조원을 대출해줄 예정이다. 이 펀드는 향후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기업여신 부실화 상황에 따라 자금 요청(캐피털 콜)을 하면 필요한 만큼 자본을 넣어주게 된다. 산은과 수은이 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코코본드를 발행하면, 펀드가 이를 사들이는 형식이다.
이 과정에서 한은은 기업은행이 펀드에 대출해준 채권을 담보로 잡는다. 이 채권은 위험자산이라서 신보의 보증을 붙여서 한은 돈이 떼이지 않도록 신용을 보강하게 된다. 한은은 이를 위해 스스로 돈을 찍어서 신보에 이 보증재원을 출연할 예정이다. 이밖에도 이 과정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면 한은법을 위반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이 모든 계약을 ‘동시 타결’로 처리하는 등 복잡한 법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한은 노조는 이날 성명을 내어 자본확충펀드 설립안이 꼼수에 꼼수를 거듭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조는 “중소기업을 지원해야 할 기업은행이 대기업과 국책은행 지원에 끌려오고, 정부가 직접 보증해야 할 펀드 대출을 엉뚱한 신보를 끌어들여 보증하게 하고, 한은이 신보 보증 재원을 대게 해서 내가 빌려준 돈을 내 돈으로 보증받는 모양새가 됐다”고 짚었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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