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씨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8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을 전격 압수수색한 뒤 압수품이 든 상자를 들고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곽정수 경제에디터석 산업팀 선임기자 jskwak@hani.co.kr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에 35개 기업으로부터 2839억원의 뇌물을 받았다.”(1995년 12월5일)
“10개 그룹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쪽에 823억원, 노무현 후보 쪽에 119억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했다.”(2004년 5월21일)
21년 전과 12년 전의 정경유착 사건 수사 내용이다. 법정에 선 총수들은 최후진술에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반성하고 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하지만 정경유착의 악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검찰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관련 정경유착 혐의 기업들에 대한 수사를 전방위로 확대 중이다. 재계 1위 삼성의 경우,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특혜 의혹과 관련해 사령탑인 미래전략실이 지난 23일 두번째 압수수색을 당했다. 재계 3위와 5위인 에스케이와 롯데는 24일 면세점 특혜 의혹과 관련해 압수수색을 받았다. 이들 모두 1995년, 2004년에도 수사를 받은 ‘단골멤버’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간 담합인 정경유착은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경제를 망치는 암적 존재다. 길게 보면 기업 자신도 해친다. 정경유착은 최순실 국정농단의 실상을 밝히는 데도 핵심 부분이다. 재벌들은 모두 “우리도 피해자”라고 하소연한다. 미르재단과 케이스포츠재단에 출연한 18개 재벌 중 다수는 뒤탈이 무서워 협조한 ‘보험형’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부는 대가를 노리고 돈을 건넨 혐의가 제기된다. 최순실 모녀에게 거액의 뒷돈을 댄 삼성은 아예 ‘기획형 정경유착’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는다.
정경유착의 악순환을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을까? 우선 정경유착 기업을 봐주는 관행부터 없애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때 검은돈을 제공한 35개 기업 대표 중에서 8명만 기소되고 정주영 현대 회장 등 나머지는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이유로 입건조차 하지 않았다. 2004년 불법 대선자금 사건 때도 ‘대외 신인도 하락’을 내세워 월급쟁이 전문경영인만 기소했을 뿐이다. 최순실 게이트는 과거 ‘재벌 봐주기’의 인과응보인 셈이다.
정경유착이 아예 발붙일 수 없는 환경과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무엇보다 기업들 스스로 투명경영·윤리경영을 통해 약점을 없애야 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그룹 지배권을 유지·승계하는 데 온갖 불법·부당 행위를 서슴지 않는 총수 일가들은 비선실세의 공갈 협박을 자초한 공범들”이라고 꼬집었다. 2000년대 중반 지주회사 전환 이후 지배구조 개선에 힘써온 엘지가 최씨의 뒷돈 요구를 받지 않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설령 권력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도 차단할 수 있는 기업 내부의 감시·견제 장치를 구축하는 것도 시급하다. 심상정 의원(정의당)은 “독립적 사외이사 선임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이 이뤄지면, 대통령이 총수들을 따로 불러 요구해도 검은돈을 줄 수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검찰 개혁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청와대와 재벌까지 성역 없는 수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충직한 ‘권력의 시녀’로서 정경유착에 일조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언론도 ‘권력의 나팔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번 사태 초반에는 국정농단의 ‘고발자’ 역할을 맡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기득권 집단에 기생해온 ‘내부자’의 본색을 드러내려는 분위기도 보인다. “검찰·정치권 압박에 숨막히는 한국 경제” “경영 공백, 사업 차질, 대외신인도 하락 우려” 등, 재벌들의 정경유착 혐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도 국민의 눈을 속인다. 대다수 언론은 지난해 7월 국민연금이 수천억원의 기금 손실을 감수하며 삼성의 불공정 합병에 찬성하는 것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이를 반성하는 언론은 한곳도 없다. 100만 국민이 촛불을 들었지만 몇년 뒤 정경유착 사건이 또다시 터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