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220여개 노동시민단체들이 8일 서울 국회 정론관에서 <정치개혁공동행동> 발족식 겸 기자회견을 열고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이제 국민의 힘으로 정치를 바꾸자”며 비례대표제 확대 강화를 뼈대로 한 선거제도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행보가 가파르다. 일자리 100일 플랜, 치매국가책임제 등 주요 사회경제정책 현안에 대한 움직임이 정권 초부터 숨 가쁘게 추진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국정 비전과 목표, 국정과제 5개년 계획 및 100대 과제 선정 작업을 진행 중이다. 조만간 이 작업이 끝나면 문재인 정부의 경제사회 개혁에 대한 정책 행보는 더욱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이처럼 경제사회 개혁과제에 관한 정책 행보가 가시화하고 있지만 선거제도 개혁 등 이른바 정치개혁 움직임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정치개혁 과제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이며, 다른 하나는 헌법개정, 곧 개헌이다. 둘 다 폭발성이 크다.
비례대표민주주의연대, 참여연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22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대거 참여한 ‘정치개혁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8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발족식 겸 기자회견을 열고 “선거제도를 포함한 정치개혁 논의를 더는 미룰 수 없다”며 “내년 지방선거 이전에 대대적인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동행동은 전국 노동사회단체들이 모여, 지난 1월 만든 ‘민의를 반영하는 선거법 개혁 공동행동’을 확대 개편한 조직이다. 소속 단체들은 이날을 기점으로 광주, 전북, 제주 등 전국에서 지역 단위 조직을 발족하고 정치개혁을 위한 온라인캠페인을 촉구할 예정이다. 윤홍식 인하대 교수는 “선거제도 개혁은 경제 및 복지개혁 등 어떤 개혁보다 중요하고 선차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가 이를 위한 움직임을 아직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는 서둘러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행보를 보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정치행정분과의 한 위원은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선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이 명확한 것 같다. 대통령은 내년 지방선거 이전 개헌을 하겠다고 밝혔는데, 선거제도 개혁을 바로 이 개헌과 연동해 함께 고치자는 생각이며 이미 이를 몇 차례 밝힌 바 있다”고 말했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19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5당 원내대표와 첫 오찬 회동에서 “권력분산형으로 가더라도 대통령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왔으나 만약 선거구제 개편 등이 같이 논의된다면 다른 정부 형태, 다른 권력구조도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장미 대선’ 과정에서도 “소외당하는 국민이 없도록 공직선거제도를 개편하겠다”고 공약했으며, 공약집에서는 구체적으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개헌을 통해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제 도입 등을 명시했다. 비례대표제 확대는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의 공약 사항이기도 했다. 다만 이런 움직임이 아직 선언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왜 비례대표제인가?
그렇다면 이들 노동시민사회단체 및 진보적 지식인들은 왜 사회경제적 개혁보다 선거제도 개혁을 이토록 강하게 제기하는가? 의아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바로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승자독식 정치를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극심한 불평등을 낳아 온 “한국의 승자독식 경제의 뒤에는 87년 체제의 승자독식 정치가 자리하고 있는데,(선학태 전남대 교수) 이런 정치를 조성하는 주요 원인이 현 선거제도에 있다 “는 판단이기도 하다.
좋은 나라, 나라다운 나라, 혹은 복지국가는 시장경제의 낙오자, 실패자를 비롯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이익과 가치가 정치적 결정 과정에 제대로 투입, 대표될 때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의 현 정치시스템은 “이해당사자들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동등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정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기득권을 지닌 이들의 정치 독과점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민주주의의 결손은 지금껏 우리 사회를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측면에서 후진국 수준을 면치 못하게 한 요소로 작동해왔다. 따라서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뼈대로 하는 선거제도 개혁은 바로 이런 정치 독과점 구조를 깨뜨리는 요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인 것이다.
전남대 선학태 교수의 논문(왜 비례대표제인가? :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그리고 합의제 민주주의)을 보면, 국회의원을 뽑는 유형엔 두 가지가 있다. 즉 비례대표제와 소선거구제다. 이 가운데 소선거구제도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실패자 및 낙오자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해 배제의 정치(politics of exclusion)를 낳는 경우가 많지만, 비례대표제는 상대적으로 이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포괄의 정치(politics of inclusion)를 작동케 할 제도적 인센티브가 있다. 이와 같은 선거제도는 또한 경험적으로 생산체제와 복지국가 체제와도 상관관계를 보인다. ①비례대표제는 유럽형 조정시장경제와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지니며 ②소선거구제는 미국형 자유시장경제와 자유주의 복지국가와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게 선 교수의 연구 결과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최승문 연구위원의 논문(선거제도와 재정정책 : 기존 논의와 향후 연구방향)은 선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재확인해준다. 최 박사의 연구 결과, 비례대표제를 주요 선거제도로 채택한 스웨덴, 덴마크 등 나라들의 국내총생산(GDP)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율(2012년도 기준)은 평균 23.28%지만,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영국, 미국, 한국 등 나라들의 비율은 18.97%로 나타났다. 최 연구위원은 이 결과를 얻기 위해 비례대표제 24개국과 소선거구제 국가 10개국의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율과 일반정부 총지출 및 수입 비율, 지니계수 등을 비교·분석했다. 비례대표제 국가들은 소득 불평등 분배 지표는 물론 재정 건전성 측면에서도 소선거구제 국가보다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비례대표제 국가는 전체 의석의 과반수를 비례대표제로 뽑는 나라를 말하며, 한국은 전체 300석 중 253석(84%)을 소선구제로 뽑는 소선거구제 국가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리나라는 국회의원과 광역지방의원의 경우 지역구별 소선거구제에 따라 한 표라도 더 많은 이가 당선되는 형태다. 여기에 정당 투표를 부분 가미해 일부 비례대표 의원을 따로 뽑는다. 기초의원의 경우에는 1선거구에서 2~4인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덧붙여 일부 비례대표(10% 수준)를 뽑는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설사 유권자의 30%, 즉 열에 세 명의 지지밖에 받지 못했어도 당선될 수 있다. 반면, 유권자의 열에 일곱은 자신의 정치적 지지가 정치적으로 반영되지 못하고 허공에 날아가 버린다. 이런 상황에선 사표 심리가 작동돼, 소신투표를 하기 어렵게 하며 더욱이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매우 어렵게 한다.
어떤 비례대표제인가?
선거제도 개혁 논의는 언제, 어떤 내용으로 이뤄질까? 이에 대해 국정기획자문위 한 위원은 “국회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마도 올 하반기부터는 논의가 이뤄지지 않겠냐”고 전망했다. 세부 방안과 관련해선 그는 지난 2015년 2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방안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점쳤다. 이 방안은 정치개혁공동행동 소속 단체들도 선호하는 안이다. 세부 내용을 보면, 국회의원 총 정수는 300명을 그대로 유지하되, 전국을 지리적 여건과 생활권 등을 고려해 6개 권역으로 나눠 정당득표율대로 배분하는 방식이다. 제시된 6개 권역은 ①서울 ②인천·경기·강원 ③부산·울산·경남 ④대구·경북 ⑤광주·전북·전남·제주 ⑥대전·세종·충북·충남이다.
선거 전문가들은 이런 식으로 선거제도 개편이 이뤄지면, 다양한 정당이 국회에 진입할 수 있고, 정당 간의 경쟁도 정책과 민의를 중심으로 이뤄질 여지가 더 크고, 유권자들도 정책을 토대로 정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본다. 이와같이 사회경제적 약자의 민의가 더 반영될 수 있는 이른바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 개혁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라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앞당기고, 튼실하게 하는 제도적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 교수는 “선거제도 개혁은 합의제 민주주의와 포괄의 정치를 위한 제도적 기반이자 나아가 모든 시민이 빈곤과 격차 그리고 실업 등의 공포로부터 사회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나라다운 나라, 즉 보편적 복지국가의 정치적 조건”이라며 “하루빨리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 교수는 또한 “이런 선거제도 개혁이 없는 개헌은 개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창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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