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한 한전 필리핀법인장이 7월5일 필리핀 마닐라의 한전 필리핀법인 사무실에서 1200MW급 일리한발전소를 설명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한전 필리핀법인 사람들은 태풍이 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한전이 필리핀에 지은 발전소 3곳의 안전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6년 12월26일 아침 9시19분, 최대풍속 215~230KPH 규모의 태풍 ‘니나’가 필리핀 루손 섬을 강타했다. 루손 섬 바탕가스(Batangas)에는 한전의 1200MW급 일리한 가스복합발전소가 있다. 한국 고리원자력발전소 1~4호기(3137MW) 발전용량의 30%를 웃도는 규모다.
태풍이 섬으로 진입하자, 직원들은 일리한발전소를 잠시 멈출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 발전소는 루손 발전량의 12%를 담당하고 있다. 결국 주민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동을 결정했다. 100여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는 강풍 속에서 일리한발전소의 송전선이 끊어지는 피해가 일어났다. 직원들은 긴급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발 빠른 수습으로 발전소는 곧바로 정상을 되찾았다.
필리핀 정부가 허용하는 불시 정지 허용일은 연간 10.95일이다. 일리한발전소는 2017년 3.3일에 그쳤다. 2017년 11월에는 필리핀안전협회가 12년(350만 시간) 무재해 달성 인증서를 수여하기도 했다. 일리한발전소는 2002년 6월 상업운전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운영한 뒤 필리핀 정부에 넘긴다. 500km 떨어진 바다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를 끌어와 가스터빈으로 전기를 생산한다. 극심한 전력난을 고민하던 필리핀 정부가 사업 기간 동안 연료 및 터를 무상 제공하면서 수익성도 뛰어나다. 2017년 기준 누계매출 2조1000억원을 일궈냈다. 대림·효성·현대중공업 등 20여 개 국내 기업이 기자재 및 시공에 참여해 수출 효과도 1억4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한전의 대표 해외사업으로 거듭났다.
7월5일 필리핀 마닐라의 한전 필리핀법인 사무실에서 박종현 기획팀장(오른쪽부터), 최상재 사업개발본부장, 고재한 법인장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한전은 일리한발전소를 포함해 세부화력발전소 등 2곳을 운영 중이다. 한전이 필리핀 전체 발전량의 약 11%를 공급하고 있다. 2017년 한전은 필리핀에서 1400MW 전기를 생산해 2억5000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고재한 한전 필리핀법인장은 “한전은 필리핀에서 지난해 830억원을 국내로 송금했다. 한전이 해외사업에서 창출하는 안정적인 수익은 국내 전기요금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한전의 해외시장 진출 때 많은 국내 기업과 함께해 국부 증대와 일자리 만들기에도 공헌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봉덕 한전 필리핀법인 감사실장은 “수익 창출에만 그치지 않고 수익 일부를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지속적인 사회공헌 활동을 펴고 있다. 환경준수 활동으로 기업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전처럼 필리핀에서 한국 기업 이미지는 좋은 편이다. 안젤리카 케이아스 필리핀투자청 국장은 ‘필리핀에서 사업을 잘하는 한국기업이 어디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삼성전자, 현대차, 한전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케이아스 국장은 “한국의 롯데 같은 유통기업이 필리핀에서 편의점 사업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한류 열풍으로 많은 필리핀 여성이 한국 화장품에 높은 관심을 보인다. 한국 화장품 비즈니스도 괜찮을 듯하다”고 말했다.
두테르테노믹스는 한국기업에겐 또 다른 기회다. 포스코대우 마닐라지사는 올해 매출목표를 3억 달러에서 1억 달러 증가한 4억 달러로 늘려 잡았다. 이우상 포스코대우 지사장은 “공공·민간 건설 분야 호황으로 철강과 시멘트 같은 건자재 수요가 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2022년까지 인프라 투자를 높이겠다고 공언했다. 도로, 공항, 항만, 에너지, 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될 것으로 보여 관련 설비 제품 공급 능력을 갖춘 한국기업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계열사 간 긴밀한 협조도 필요하다. 현재 필리핀에서는 포스코와 포스코대우, 포스코건설이 나와 있다. 이들 기업은 각자 영역에서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사업을 진행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우상 지사장은 “포스코대우는 과거 종합상사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종합사업회사로 다양한 분야의 사업 기회를 발굴하고 있는데, 이를 그룹 계열사와 공유하면서 각 사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계열사뿐 아니라 해외 네트워크가 부족한 국내 중소기업들의 수출 업무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이우상 포스코대우 마닐라 지사장이 필리핀 마세티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건설업도 눈여겨볼 만하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인프라에 대대적인 투자를 공언함에 따라 건설업이 유망 산업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2016년 기준 건설부문 시장 규모는 매출 기준 214억 달러로 한 해 전에 견줘 13.7% 증가했다. 마닐라 등 대도시 교통 인프라 건설 사업이 성장세를 주도하고 있다. 추설희 코트라 마닐라무역관 과장은 “2017년 5월 기준, 우리나라 기업이 필리핀에서 수주한 건설 프로젝트 규모는 1억278만 달러로, 필리핀 수주액이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필리핀 중앙은행 역시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 인프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건설시장은 앞으로 수년 동안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필리핀이 강한 분야에서도 한국의 강점을 잘 활용하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필리핀은 원두 산지로 유명하다. 로부스터, 아라비카, 헤이즐넛 등 다양한 원두를 생산해 수출하고 있다. 커피 강국인 필리핀에서도 잘하면 커피를 팔 수 있다. 바로 한국산 인스턴트커피다. 한류 열풍으로 최근 한국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필리핀 사람 입맛에 조금만 맞춘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인스턴트커피 판매가 커피숍 커피에 밀려 힘든 시점으로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다.
실버산업도 해볼 만하다. 한국의 실버 인구가 증가하고 있지만, 높은 인건비로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기 힘든 상황이다. 심재학 산토 토마스 대학 경영학과 교수는 “원거리 의료 시스템이 계속 개발되고 있다. 저렴한 물가, 친절한 필리핀 국민성, 노인층에게 적합한 날씨를 고려할 때 필리핀에서의 실버타운 등은 유용한 사업 아이템이 될 수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시장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재학 산토 토마스 대학 경영학과 교수가 7월4일 필리핀 마닐라 보니파시오에 있는 코트라 마닐라무역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려면, 중산층 증가와 높은 소비성향 등 문화·사회적 변화를 잘 이해해야 한다. 필리핀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것이 많지만 다른 것 역시 많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필리핀 시장에 맞게 우리 상품, 서비스, 기업 문화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