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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코드에 갇힌 그들
2018년 서울의 한 대형 병원이 내부적으로 검토했던 복장 매뉴얼이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 병원 내 전체 의사직에 공지된 ‘의사 용모·복장 매뉴얼’은 여성의 용모복장 및 Good & Bad, 남성의 용모복장 및 Good & Bad, 용모복장 체크리스트 등으로 구성됐다. 문제는 의료인 자질과 무관한 세부 사항을 구체적으로 표기한데다, 여의사에게 엄격하고 성차별적인 항목이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여의사에게 해당하는 항목을 보면 △‘화장기 없는 얼굴은 건강하지 않게 보이므로 생기 있는 메이크업’ 지시 △눈썹 정리와 아이브로 사용, 아이라인 혹은 마스카라 사용과 블러셔, 구체적인 립스틱 색상과 수정화장 지시 △뒤 옷깃에 닿는 머리부터는 올림머리로 연출, 헤어 제품을 사용해 잔머리를 완전히 없앨 것 △마스크 착용시에도 메이크업과 틴트 사용으로 입술 색깔을 ‘화사하게’ 할 것 △체크리스트에서 성별을 분리해 메이크업과 스타킹 등 지시 등이 포함됐다. 반면 남의사에겐 △면도와 코털 정리(남성) △로션 사용(남성) △은은한 향수 사용 권장(남녀 공통) 등 청결과 위생, 깔끔한 인상과 관련 있는, 상대적으로 유연한 규정을 적용했다.
의사들이 발끈한 건 당연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해당 병원에 “인권침해적이고 성차별적이며 시대착오적인 매뉴얼을 철회하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위생과 청결, 감염 관리 등 의료인이 추구해야 할 합리적인 복장 가이드라인이 아니라 여의사를 화사하게 단장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게 문제라는 것이다. 논란이 확산되자 병원 쪽은 내부 검토 단계에 있었던 것이라 해명하고, 사실상 매뉴얼을 폐기했다. 그럼에도 이 해프닝은 드레스코드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어서 씁쓸함을 남겼다.
경제 사정이 나아지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우리 사회에 남녀 차별 문화는 많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여성에게 외모와 여성성을 강조하는 문화는 곳곳에 남아 있다. 공공연하게 우스갯소리로 ‘화장 안 한 여자는 예의를 모른다’ ‘스스로를 가꾸지 않는 여성은 여자이길 포기했다’거나 ‘뚱뚱한 여자는 게으르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여성의 겉모습을 경쟁력과 능력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그릇된 시각은 판매직 여사원 등 서비스업뿐 아니라 승무원, 은행원, 의사와 간호사 등 전문직 여성을 바라볼 때도 예외가 아니다. 백화점, 면세점, 명품 매장, 호텔 등 최고급 서비스를 지향하는 곳일수록 이런 인식이 더 심해 현재까지 곱게 화장하고 회사에서 지급한 유니폼을 입은 채 고객을 맞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국여성민우회가 발표한 ‘2017 성차별 보고서’를 보면 외식업체·영화관·피시방 등에서 여성에게만 안경 착용을 금지하거나 립스틱 검사 등 용모 기준을 적용한 사업장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처럼 업무 능력과 서비스 질보다 겉으로 보이는 ‘외적 요건’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남녀차별 문화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여성들은 말한다. 여성을 남성과 마찬가지로 외모와 복장이 아닌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가진 노동자로 봐달라고. 최근 불거진 일련의 ‘탈코르셋 운동’은 드레스코드를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금기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여성들의 움직임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이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최근 들어 바지 입는 승무원, 안경 쓴 아나운서, 사복 입는 금융권 여직원과 판매직 여사원 등이 생겨나고 있다. 억압과 차별의 상징이던 드레스코드 규정을 완화하는 기업의 움직임도 있다. 남녀 차별을 야기하는 금기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이다. 제주항공이 승무원의 안경 착용과 네일아트를 허용한 데 이어 굽 낮은 구두를 언제든 자유롭게 신도록 복장 규정을 완화한 것이 단적인 예다. 고무적이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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