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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대법원은 ‘을의 옥중편지’에 귀를 기울일까?

등록 2019-05-03 19:11수정 2019-05-04 13:09

[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정의당 추혜선 의원과 ‘자동차산업 중소협력업체 피해자협의회’가 지난 2월26일 국회 정론관에서 “하청업체들이 부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불가피하게 납품을 중단할 시 형사처벌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하청업체 납품중단시 형사처벌 금지 입법 청원 기자회견’을 열었다. 재판을 받고 있는 현대차 2차 협력사인 태광공업 손영태 전 회장의 부인이 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정의당 추혜선 의원과 ‘자동차산업 중소협력업체 피해자협의회’가 지난 2월26일 국회 정론관에서 “하청업체들이 부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불가피하게 납품을 중단할 시 형사처벌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하청업체 납품중단시 형사처벌 금지 입법 청원 기자회견’을 열었다. 재판을 받고 있는 현대차 2차 협력사인 태광공업 손영태 전 회장의 부인이 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오늘로 교도소에 들어온 지 78일째 되는 날입니다.”

4월 하순 대구교도소에 있는 손정우씨로부터 편지가 왔다. 노란색 봉투에는 ‘불효자 손정우’라고 쓰여 있었다.

손씨는 2년 전만 해도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인 태광공업의 사장이었다. 하지만 지난 1월말 대구고법 형사1부(재판장 박준용)는 공갈 혐의로 손씨에게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부친인 손영태 전 회장도 징역 2년6개월 형을 받았다. 부자가 법정에서 함께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여 끌려가는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태광공업은 완성차(현대자동차)→1차 협력사(서연이화)→2·3차 협력사(태광공업)로 이어지는 자동차산업 하청구조의 말단에 위치해 있다. 손씨 부자는 24년간 서연이화에 자동차 부품을 공급하며 줄곧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의 ‘갑질’에 시달리면서도 연 매출이 400억~500억원에 이르는 중소기업을 일구었다. 손 전 회장이 협력업체 모임의 회장을 10년간 맡았을 정도로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현대차의 성장세가 꺾이자 오랜 갑질에 이미 골병이 든 태광공업도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부도 위기에 처한 태광공업이 납품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을 통보하자, 서연이화는 생산 차질을 피하기 위해 태광공업을 인수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납품 중단을 무기로 회사를 비싸게 팔았다며 공갈죄로 고소했다.

태광공업 건은 단순한 공갈사건이 아니다. 종속적 하도급거래에 기반한 불공정거래라는 구조적 문제와 직결돼 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치러진 1심 재판부도 이 점을 인정했지만, 공갈이라는 기존 법리의 틀을 깨는 데는 실패했다. 손씨 부자는 수사·재판 과정에서 서연이화가 공갈이라고 주장한다면, 지금이라도 인수계약 자체를 무효로 하자고 수차례 주장했다. 하지만 서연이화는 끝내 계약 무효를 통한 피해회복을 외면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였다. 서연이화가 ‘위장된 공갈 피해자’라고 충분히 의심할 만했지만, 법원·검찰은 눈을 감았다. 윤동호 국민대 교수는 “태광공업에 공갈죄가 성립한다면 인수계약에 관여한 변호사들은 모두 공갈죄 방조가 성립돼야 한다”고 꼬집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새 증거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국민참여재판으로 집행유예 형이 결정된 1심을 뒤집고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손씨 부자가 자동차산업의 신뢰관계를 훼손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신뢰관계를 먼저 훼손한 것은 오랫동안 갑질을 자행한 서연이화라고 손씨 부자 쪽은 주장한다. 조인명 변호사는 “항소심 재판부는 재판의 민주적 정당성과 신뢰를 높이고, 법리적 도그마에 갇히기 쉬운 직업 법관의 판단이 일반 국민의 눈높이와 상식에 근접할 수 있도록 하자는 국민참여재판의 도입 취지를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법원이 손씨 부자를 동시에 실형 선고한 것은 수백억, 수천억 규모의 불법 비리를 저지른 재벌 비리 사건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검찰과 법원이 ‘갑질 도우미’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는 갑질 근절을 공정경제의 최우선 정책과제로 제시했다. 손씨 부자는 2017년 7월 공정거래위원회에 서연이화의 갑질을 신고했다. 2018년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질타가 쏟아졌다. 하지만 공정위는 2년이 지나도록 손을 놓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태광공업과 같은 처지의 중소기업이 여럿이라는 점이다. ‘을의 비명’을 공갈죄로 옭아매는 신종 갑질 사건은 2013년 이후 확인된 것만 10여건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법원에서 이미 상고기각돼 유죄로 확정됐다.

곽정수 선임기자
곽정수 선임기자

대법원 판결을 앞둔 손정우 전 사장은 마지막 호소문을 보냈다. “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아버지가 교도소에 들어오신 것은 정말 너무 죽고 싶습니다. (중략) 부족한 저에게 자동차 하청업체의 노예 같은 현실과 부친이 무죄임을 공개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꼭 주십시오.” 이르면 이달 안에 대법원의 결정이 나올 예정이다. 사법부는 법치주의의 최후의 보루로 불린다. 대법원이 과연 을의 옥중편지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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