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30일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삼성이 불법비리 스캔들의 수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6년 10월 국정농단세력 뇌물사건으로 시작된 스캔들은 노조파괴사건을 거쳐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 분식회계·증거인멸 사건으로 이어지며 더욱 확대되는 분위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삼성의 역대 최고실적을 견인해온 ‘반도체 특수’까지 차갑게 식었다. 자신만만하던 삼성의 표정도 확 바뀌었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이러다가 정말 망할 것 같다. 휴대폰 1위였던 노키아의 몰락도 한순간이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기도 바닥이다. 계열사 대표는 삼바 공장 바닥에 회사 서버를 감춘 게 드러난 뒤 “글로벌 초일류를 자부하던 우리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삼성의 위기는 스스로 자초했다는 지적이 많다. 기업들은 대형 불법비리 스캔들이 터지면, 사업에 미칠 파장을 막기 위해 서둘러 대책을 내놓는게 상식이다. 삼성도 2006년(안기부 엑스파일 사건)과 2008년(비자금 의혹 사건) 두차례 대국민사과를 했다. 특히 2008년에는 이건희 회장을 포함한 수뇌부의 동반퇴진, ‘컨트롤타워 해체’를 포함한 쇄신안을 전격 발표했다.
하지만 삼성은 지난 3년간 잇달아 국민을 큰 충격에 빠뜨리고도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이 부회장은 뇌물사건 최후진술에서 “제 사익을 위해 대통령에게 부탁한 적은 결코 없다”고 항변했다. 사법당국의 판단과 여론에 정면으로 거슬러왔다.
삼성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삼성 스캔들의 중심에는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가 자리잡고 있다. 삼성 뇌물사건 2심 재판부는 경영권 승계를 위한 부정한 청탁을 부인하며 1심 재판부와 상반된 판단을 했지만, 분식회계 및 증거인멸 수사에서 승계작업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이를 부정하는 상황에서 전문경영인들이 대국민사과를 건의하며 총수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수습의 열쇠는 이 부회장이 쥐고 있는 셈이다.
이제 이 부회장은 자신을 살리기보다, 안팎의 도전 속에서 위기감이 높아지는 삼성을 살리는 길을 찾을 때다. 그 출발점은 자신의 문제로 인해 삼성이 더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방화벽’을 제대로 쌓는 일이다. 이미 삼성은 막대한 유무형의 피해를 입었다. 삼성전자로서는 지난 4월30일 대통령이 직접 공장을 방문해 비메모리 반도체 지원 의지를 밝힌 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대법원 선고를 앞둔 이 부회장을 만난 것 때문에 적절성 논란이 불거지며, 모든 것이 가려졌다. 요즘에는 삼성이 투자·고용이라는 말만 꺼내도 이 부회장을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이 부회장은 대법원 선고를 피할 수 없다면, 그 이전에 경영권 승계를 포함해 솔직한 입장을 밝히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계열사 고위임원은 “이건희 회장이라면 이렇게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며 “국민에 사과하고 어떤 식으로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삼성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국민이 외면하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중견그룹의 회장은 “진작에 몇년 (감옥에) 들어갔다 오겠다고 생각했어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일각에선 총수 공백으로 인한 ‘삼성 위기론’, ‘한국경제 동반위기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장영철 경희대 교수는 “윤리·준법경영을 준수하지 않는 기업이 성공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진다”면서 “경제에 미칠 영향을 겁내서 그냥 지나친다면, 삼성과 한국경제가 새롭게 도약할 기회를 오히려 늦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삼성의 지배구조와 경영체제를 재검토해야 한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갑자기 쓰러진 뒤, 이 부회장이 삼성의 새로운 총수로서 ‘이건희 시대’와 차별성 있는 ‘뉴 삼성시대’를 열어달라는 기대가 컸다. 이건희 회장 시절 삼성은 뛰어난 경영성과에도 불구하고 지배구조와 사회책임에서는 국민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해 ‘빛과 그늘’이 공존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실망이 크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출신 인사는 “이건희 회장은 1987년말 회장에 취임한지 5년만인 1993년초 신경영이라는 비전을 내놨고, 이후 지속해서 화두를 던지며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면서 “반면 이 부회장은 5년간 제대로 내놓은 게 없다”고 비교했다.
재벌은 3·4세 시대로 넘어오면서 오너중심경영 일변도에서 벗어나, 지배구조와 경영체제를 보다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이 부회장이 경영을 잘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본인은 대주주로서 감독역할을 충실히 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는 말했다. 이 부회장 자신도 수년젼 “총수는 단순히 지분이 많다고 되는게 아니라, 임직원들로부터 리더십과 경영역량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마침 7일은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선언을 한지 26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도 삼성을 위해 무엇을 바꿀지 고민해야 한다.
곽정수 산업팀 선임기자 jskw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