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뇌물공여 등 최종심 앞
재계·보수 언론 ‘위기론’ 불때기
총수 형사처벌 때마다 단골메뉴
“계열사·이사회 잘 대처하면 돼”
실적 타격? 구속 때 이익 늘기도
CEO 공백? “리더십 보인 적 있나”
“황제경영 탈피·준법경영 계기로”
그래픽_김지야
‘폭풍전야 삼성’, ‘비상경영’, ‘창사 이래 최대 위기감’….
29일 예정된 대법원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뇌물공여사건 선고를 앞두고 경제계와 보수언론이 ‘이재용 구속=삼성 위기론’을 본격 제기하고 있다. 삼성도 ‘대법원 파기환송→이재용 실형선고→삼성 위기’ 시나리오를 은근히 흘리는 중이다. 이 부회장의 잇단 현장 방문도 존재감 과시를 통해 판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많다.
‘총수 구속=경영 위기’ 주장은 재벌 총수가 형사처벌에 직면했을 때마다 불거지는 ‘단골메뉴’다. 이 부회장의 구속 시점과 1·2심 판결 때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이는 ‘총수 중심 경영’을 하는 재벌의 현실을 일정 부분 반영한다. 대형 투자·인사 등 주요 의사결정은 총수의 최종승인이 있어야 확정된다는 게 정설이다. 오죽했으면 ‘황제경영’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졌을까.
삼성의 경우 일본 수출규제라는 특수성까지 더해졌다. 삼성은 이른바 ‘한-일 경제전쟁’의 최전선에 있다. 이 부회장은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발표 직후 직접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익명을 요청한 경제단체의 한 임원은 “임진왜란 때 선조는 일본을 이기기 위해 이순신 장군을 백의종군시키지 않았느냐”고 했다. 이 부회장을 이순신 장군에 빗댄 것이다.
민주노총·민중공동행동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26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오는 29일로 예정된 대법원의 국정농단사건 최종 선고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갖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구속을 촉구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전문경영인 체제가 잘 갖춰진 삼성에서 ‘총수 구속=경영 위기’ 주장은 과장이라는 반론도 많다. 경제개혁연대 소장인 김우찬 고려대 교수는 “이 부회장이 구속돼서 삼성이 흔들리고, 한국경제가 타격을 입는다면, 재벌과 한국경제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총수 1명에 좌지우지되는 큰 허점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삼성 계열사의 대표와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고, 계열사 간 협의를 통해 대처하면 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전직 임원도 “삼성이 평소 시스템이 잘 갖춰진 기업이라고 자랑하다가, 총수가 처벌에 직면할 때마다 경영위기를 강조하는 것은 속 보이는 짓”이라고 꼬집었다.
이 부회장이 구속되면 일본 수출규제에 대처를 못하고 큰일이 날 것처럼 얘기하는 것도 과장이라는 지적이다. 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은 “일본 수출규제 대처는 전문경영인들이 하면 된다”며 “이 부회장이 일본을 방문했지만 실제 한 것은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또 ”이 부회장은 처음부터 갈 이유가 없었지만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간 것”이라며 “총수가 가야 해결된다면, 에스케이(SK)는 왜 최태원 회장이 가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재벌 총수를 항공모함 함장에 비유했다. “함장이 직접 항공모함을 모는 게 아니다. 총수가 하는 전략적 의사결정은 1년에 두세번에 불과하다. 총수가 감옥에 들어가면 변호사가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데, 감옥에 있어도 그 정도는 못할 것이 없다.”
실제 과거 삼성전자의 경영실적은 총수 공백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부회장은 뇌물공여 사건으로 2017년 2월17일(구속)부터 2018년 2월5일(항소심 집행유예 선고)까지 1년간 구속됐다.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이 부회장이 건재했던 2016년 29조2천억원(연결 기준)이었으나, 구속 중이던 2017년에는 53조6천억원으로 2배 가까이 급증했다. 이 부회장이 풀려난 2018년에는 58조8천억원으로 더 늘었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12조7천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30조5천억원)의 절반에도 못미쳤다. 삼성전자의 실적은 이 부회장의 구속 여부가 아니라 반도체 시황에 좌우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부회장의 부친인 이건희 회장도 비자금 사건으로 2008년 4월(경영퇴진)부터 2010년 3월(경영복귀)까지 2년간 공백이 있었다.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이 회장이 건재했던 2007년에 8조9천억원이었으나, 경영공백 첫해인 2008년에는 6조원으로 줄었다. 하지만 경영공백 두번째 해인 2009년에는 11조원으로 2배 가까이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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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회장이 그동안 삼성 최고경영자로서 리더십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은 2016년 국정농단사태 이후 뇌물 사건, 노조파괴 사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 등 대형 악재가 줄줄이 터졌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제대로 된 수습책을 한번도 내놓은 적이 없다. 삼성 계열사 고위임원은 “이건희 회장이라면 지금껏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며 “삼성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고,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국민이 외면하겠느냐”고 탄식했다. 또 이건희 회장은 2010년 경영복귀 직후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부친이 쓰러진 2014년 이후 5년이 지나도록 삼성의 미래성장사업에서 확실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삼성 계열사 간부는 “배가 항로와 속도를 결정하는 선장이 없다면 위기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삼성이라는 배의 선장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크게 달라질 게 없다”고 말했다.
삼성과 한국경제에 일부 영향이 있어도 법치주의 확립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우찬 교수는 “구속에 따른 영향이 크지 않겠지만 일부 있더라도 대법원이 법에 따라 공정하고 엄정하게 판단하는 게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며 “대법원이 삼성의 경영과 일본 수출규제 대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주진형 전 사장은 “강제징용 배상판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가적 부담이 커졌지만, 국민 다수는 대법원 판결을 지지하고 있다”며 “마찬가지로 이재용 판결도 삼성과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기보다 법과 원칙에 따라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삼성이 이번 기회를 ‘황제경영’ 탈피, 이사회 중심 경영, 윤리·준법 경영 준수 등 선진국형 경영방식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피터드러커소사이어티 공동대표인 장영철 경희대 교수는 “국내 대기업이 엄격한 윤리·준법경영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총수는 적용 예외인 게 문제”라며 “윤리·준법경영을 준수하지 않는 기업은 성공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만큼, 당장 경영에 미칠 영향을 겁내기보다 삼성과 한국경제가 새롭게 변화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Weconomy 홈페이지 바로가기: https://www.hani.co.kr/arti/economy ◎ Weconomy 페이스북 바로가기: https://www.facebook.com/econohani[관련 영상] 한겨레 라이브 | 뉴스룸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