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유럽연합(EU)은 한국이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약속한 ‘노동권 조항’을 지키지 않았다며 무역분쟁 해결 절차를 개시했다. 한국이 노동기본권을 규정해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기로 약속해놓고 7년째 미룬다는 이유였다.
무역에 관련한 사안이 아닌 노동권 조항을 이유로 분쟁해결 절차를 밟은 것은 유럽연합이나 한국이나 처음 겪는 일이었다. 경영계 반대를 이유로 시간을 끌어온 한국 정부는 지난 2월 국회에서 핵심협약 비준안이 통과되면서 한시름 놓을 수 있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전통적으로는 무역과 직접 관련이 없었던 환경·노동 규범이 통상 질서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한국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14일 연구보고서 ‘자유무역협정 신통상규범에 관한 통상법적 쟁점과 경제적 영향’을 통해 “환경 보호와 노동자 보호 등 무역에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비무역적 사안을 규율하는 자유무역협정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를 상대로 한 환경·노동 분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선제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흐름은 전통적으로 환경·노동과 관련한 국제적 논의를 이끌어온 유럽연합과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환경과 노동권을 희생하면서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가격 경쟁력을 낮출 수 있게 되면, 각 국가가 ‘아래를 향한 경쟁’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국제적 규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다. 환경이나 노동권에 대한 논의가 발전되지 못한 개발도상국들은 이런 무역 규범이 사실상 ‘무역장벽’이나 ‘보호무역주의’로 작용한다며 반발하기도 했지만 국제적인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핵심은 ‘집행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각종 장치다.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은 노동권 조항을 위반해도 ‘경제적 제재’가 불가능한데, 이런 경우 집행 가능성이 취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탓이다. 그동안 자유무역협정의 환경·노동 의무는 ‘단순 선언적’ 성격이 강했지만, 최근 유럽연합과 미국은 이를 ‘실체적이고 법적 구속력 있는 의무’로 끌어올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보고서는 “환경·노동 의무 위반을 이유로 자유무역협정을 정지·종료시키는 방안, 위반국에 무역조치를 부과하는 방안 등을 포함해 제재 위주의 접근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대외 기후·통상정책에 변화를 예고한 만큼, 한국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우리가 수용한 의무를 충분히 이행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우리나라를 상대로 불거질 수 있는 환경·노동 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취지다. 보고서는 “다자환경협정(MEAs)의 국내적 이행 촉진에 자유무역협정이 적극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당사국간 환경사안 관련 통보의무를 강화하고, 환경법의 국내적 이행 상황을 당사국 상호 간에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준수 모니터링 체제를 구축하는 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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