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1일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였던 도널드 트럼프가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에어컨 제조사 캐리어 공장을 방문해 노동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트럼프는 캐리어가 이 공장을 멕시코로 이전하려는 것을 막아 1100명의 일자리를 지켰다고 홍보했다. 인디애나폴리스/AP 연합뉴스
토니 마이클은 1979년 소련에서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치기공 장비였다. 미 시카고 외곽에 있는 그의 사무실 한쪽 그때 들고 온 손망치와 때 묻은 크라운, 보철물 등이 전시돼 있다. 3명이 공동 운영하는 치기공소는 돈벌이가 예전만 못하다. 디지털 기술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그가 느끼는 더 큰 위협은 중국이다. 그의 가게에서 이빨에 덧씌우는 크라운을 제작해 200달러에 치과에 넘기지만 중국산은 30달러밖에 안 된다. 주문하면 1주일 만에 항공으로 배송된다.
약 10조원에 이르는 미국 치기공 시장은 매년 성장하지만 치기공소는 사업자 고령화로 인한 은퇴와 저가의 중국산 수입 등으로 매년 그 수가 줄고 있다.
마이클이 자신의 삶 가운데 느끼는 것은 거대한 기술변화와 중국 효과로 밀려나는 러스트벨트(미 중서부와 북부 쇠락한 공업지대) 제조업 노동자들이 겪은 대서사의 축소판이다. 세계화란 이름 아래 자유무역의 확산이 빚은 고통이었다. 2000~2010년 러스트벨트 지역 여섯개 주에서 제조업 고용은 35%나 감소했다. 대공황 때보다 더 급격했다. 일자리 감소의 4분의 1은 중국 효과로 추정됐다.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지만 안정적이지 않거나 보수가 낮았다. ‘버려진 이들’, ‘낙오자들’로 불린 러스트벨트의 백인 노동자 계층에게 도널드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는 효과가 컸다. 트럼프는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일자리를 되찾아주겠다고 장담했다. 2016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결정적이었다.
미 브루킹스연구소의 존 오스틴 비상근 선임연구원은 “러스트벨트는 지정학적으로 많은 주민이 소외감과 낙오감을 느끼는 지역으로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서구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정치적 양극화를 조장하는 국수주의, 민족주의, 고립주의, 경제적 향수를 자극하는 비옥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는 비옥한 그곳에 제대로 씨를 뿌렸다.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아메리카 퍼스트는 속 시원한 사이다와 같은 구호다. 경제학을 전공한 뒤 밀워키에 있는 보험사에서 일하는 에런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의 한 세기 동안 미국인을 우선하지 않는 정책이 이어져 왔다. 그런데 트럼프가 바꿨다. 그는 미국의 이익과 노동자를 위해서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 정책을 폈다.”
2016년 1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항구에 중국산 제품을 실은 컨테이너가 하역을 기다리고 있다. 트럼프는 2년 뒤 중국 제품들이 미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며 중국 제품에 25%의 수입 관세를 부과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의 이익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트럼프가 쏜 화살의 과녁은 중국이었다. 글로벌 분업구조의 하청 기지로 중국을 편입시킨 미국은 오랫동안 그 효과를 톡톡히 누렸지만 몸집이 커진 중국은 이제 패권에 도전하는 ‘위협’이다. 트럼프는 2018년 중국산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했고 중국이 맞불을 놓으면서 무역 갈등이 불붙었다. 두 나라 갈등으로 세계 무역 불안지수가 치솟았다.
아메리카 퍼스트의 흔적은 1933년 후버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 서명한 ‘미국산 구매법’(Buy American Act)에서 찾을 수 있다. 정부가 미국산 제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하는 보호주의 법률안이었다. 분명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은 이전에 없던 것이 아니지만 트럼프 때 백인 노동자 계층의 표심을 얻기 위한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해 무역, 국제 관계 등에서 보다 명확하게 선언됐다. 특히나 트럼프의 전통과 정책의 대척점에 설 것으로 예상했던 조 바이든은 아메리카 퍼스트를 더욱 확산시키고 강화했다.
박복영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면서 조달이나 무역정책에서 미국산 제품 우선 구매, 보호주의 정책, 대중 무역압박 등은 유지 강화되었다”며 “트럼프의 정책이 중국에 대한 무역압박에 국한된 것이라면 바이든의 대중정책은 무역압박(보호주의)과 가치외교(홍콩 인권과 대만 문제 제기 등)가 결합하여 전략 경쟁과 체제 경쟁이 본격화한 것”이라고 짚었다. 바이든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CHIPS Act)을 그 수단으로 썼다. 미국에 공장을 짓도록 해 제조업 일자리를 늘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도전과 추격을 차단하는 전략이다.
국내 정치적 효과는 컸지만 실제 경제적 효과는 검증되지 않았다. 지구적으로는 큰 혼란을 겪고 비용을 치르고 있다. 오태웅 드포대 교수는 “인플레를 억제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은 종종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며 “보호무역주의 또한 가격 상승과 제품 품질 하락, 공급망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선 뒤 미-중 무역갈등으로 전례 없는 수준으로 치솟은 세계무역불안지수. 전미경제조사국 보고서 갈무리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트럼프에 이어 바이든조차 제조업 일자리를 명분으로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한 배경엔 분명한 정치적 이유가 있다. 박 교수는 “미 백인 노동자 계층(러스트벨트 지역)의 실업과 불만 고조 때문이다. 지난 몇 차례 대선에서 이들의 표심이 대선 당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아메리카 퍼스트는 미-중 무역 갈등을 키웠고 코로나19 팬데믹까지 덮쳐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을 가속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인플레를 키웠다. 다중위기가 낳은 고물가와 이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고금리 처방은 전세계에 고통과 불안을 키웠다. 아메리카 퍼스트는 다중위기란 나비효과를 일으킨 날갯짓이었다. 그 비용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나눠 치르고 있다.
시카고 워싱턴/류이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