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기소인부절차가 진행된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 앞에서 그의 반대자들(왼쪽)과 지지자들이 경찰을 사이에 두고 거친 말을 주고받고 있다. 뉴욕/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제1야당 대표 단식, 체포동의안 통과, 지지자들 시위, 구속영장 청구와 기각. 한국에서 벌어지는 극한 정치적 대립은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민주주의 수호자를 자처해온 미국에서 3년 전 폭동으로 의사당이 점거됐고 전직 대통령마저 기소됐다. 상대편을 ‘적’으로 간주하는 적대정치가 팽배한다. 민주주의 위기는 패권경쟁, 전쟁과 인플레이션 등 다중위기와 겹쳐 삶의 불안을 키운다. 오는 11일 ‘다중위기 시대: 공존의 길을 찾아’를 주제로 한 ‘한겨레’ 아시아미래포럼에 맞춰 위기 원인을 짚고 대안을 모색하는 기사를 세 차례 싣는다.
5년 전 정치학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요한 쉬테상을 받은 제인 맨스브리지 하버드 케네디스쿨 명예교수는 미국정치학회 회장까지 지낸 탁월한 민주주의 이론가다. 오는 11일 한겨레가 주최하는 아시아미래포럼에서 ‘민주주의 위기의 근원’을 주제로 강연하는 그를 지난달 7일 인터뷰했다. 그는 시장을 길들이고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정치 양극화를 해소하는 길이라고 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제인 맨스브리지 미국 하버드 케네디스쿨 명예교수가 지난달 7일 보스턴 외곽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류이근 선임기자
―최근 민주주의 위기가 과거와 다른가?
“지금 실수한다면 과거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과거에는 전쟁이 일어났지만 지금은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위험이 더 커졌다.”
―많은 나라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양극화에 공통 원인이 있나?
“양극화는 시장의 확장이 가져온 불평등과 자본주의 길들이기 목표의 후퇴로 발생한다. 불평등이 커지면 ‘우리’(We-feeling)라는 공동체 의식이 무너진다. 서로 더 멀어지고 소통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을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게 한다. 더 많은 정치적 권력을 가진 부유층은 노동계급이나 빈곤층의 삶이 어떤지 모르거나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얻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면 동질감을 느끼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 적을 찾아 악마화하거나 전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길들일 수 있나?
“자본주의를 방치하면 더 많은 경제, 사회적 불평등을 낳는다. 자유 시장을 없애자는 얘기가 아니다. 스칸디나비아(북유럽)에서 해왔던 것처럼 자본주의를 길들여야 한다. 늑대를 데려와 오래 키우면 친구가 된다. 강력한 복지국가를 통해 국민이 안전하다고 느끼면 자신이 국가의 일원이라고 여기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북유럽의 정치적 양극화 해소와 강력한 복지국가는 상호 연관돼 있다. 양극화가 없어야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우리란 느낌’도 강해진다.”
그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더 많은 ‘자유 사용재’(Free use goods)가 필요하다며 무임승차(Free riding)와 규제, 국가의 강제력이란 개념 등을 동원해 설명한다. 누구나 공짜로 쓸 수 있는 도로, 항만, 안보 등 자유 사용재를 더 많이 공급해야 정치 양극화를 줄일 수 있고, 조세 징수 등 국가의 강제력과 이를 어겼을 때 처벌할 수 있는 합법적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장주의의 확산과 탈규제를 좇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성찰이 깔렸다. 50% 안팎 세금을 내면서 충분한 자유 사용재를 공급받는 북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은 양극화를 줄이기 위한 그의 해법이기도 하다. 다만 부패가 없어야 한다.
―적대적 민주주의 대안은?
“무작위로 선정된 100명 또는 그 이상의 시민이 모여 정책을 심의하고 입법부나 행정부에 조언하는 ‘시민의회’ 등을 실험해보면 좋겠다. 또 이른바 ‘의회 연결’로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이 선출된 대표자와 문제를 논의해 풀어갈 수 있다. 시간과 충분한 사실적 근거가 제공되고 계급과 정치적 노선을 넘어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시민들도 정책을 심의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공동의 이익과 관심사를 찾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끝으로 그는 내년 미국 대선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출마해 당선된다면 민주주의 위기가 훨씬 더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보스턴/류이근 선임기자, 노영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보조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