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인이 지난 7월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폐지를 실은 수레를 밀어 고물상으로 향하고 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가운데 노인 빈곤이 가장 심각한 나라다. 김정효 기자
불평등은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핵심 열쇳말이다. 우리 앞에 놓인 많은 난제, 고통, 불안의 기저에 불평등이 있다. 소득과 자산 등 전통적 의미의 불평등이 여전한 가운데 불평등 의제는 공정성 담론에 부딪혀 길을 잃기도 하고, 기후위기, 고령화와 돌봄, 인공지능 등 급격한 변화에 직면해 뒤엉키고 뒤틀리기도 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원장 이봉현∙HERI)은 상생과 연대를 위한 대안 공론장을 지향하는 소셜코리아(운영위원장 윤홍식)와 함께 ‘다시, 한국의 불평등을 논한다’ 기획을 시작한다. 한국의 불평등 논의는 왜 견고히 이어지지 못하고 부침을 거듭하는지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
소셜코리아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HERI)이 공동 기획한 ‘다시 한국의 불평등을 논한다’는 올 하반기 3회에 거쳐 1부를 마쳤다. 1부에서는 불평등 연구에 헌신해온 신광영 중앙대 명예교수 인터뷰를 한 데 이어 기후위기 관점에서 불평등을 짚는 김병권 녹색전환연구소 자문위원의 기고를 받았다. 또 윤자영 충북대 교수, 권혜원 동덕여대 교수와 함께 ‘성 불평등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주제로 좌담을 나눴다.
2부는 자신을 ‘불평등 전문가는 아니’라면서도 불평등에 관심이 많아 책까지 낸 사회학자 조형근의 인터뷰로 첫 회를 시작한다. ‘불평등을 말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나’로 주제를 좁혀서 묻고 답했다. 그는 불평등을 둘러싼 담론의 외피와 위선, 모순을 한꺼풀 벗겨냈다.
―불평등을 논하면서 뭔가 빠져 있다고 느끼는 게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거실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기사를 보다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다고 공감한다면, 실제 상황은 그보다 훨씬 심각하다.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더 불평등해졌다’, ‘소득이나 자산 불평등이 커졌다’, ‘전보다 계층 상승이 어렵다’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힘과 역량이 불평등해졌다는 뜻이다. 목소리 크기가 다 다른데 그 차이가 더 벌어졌다는 의미다.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을 수 있다. 훨씬 심각한 이야기들이 체로 걸러진 뒤 일반인 시각에서 볼 때도 심각해 보이는 것일 수 있다.
불평등 논의에서 빠져 있는 것 중 하나는 불평등 문제의 주체이자 당사자다. 이들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논의가 상대적으로 적다. 불평등 문제조차 주류화한 방식으로 논의된다는 게 불평등 문제를 다룰 때 가장 간과되는 지점이다.”
지난 14일 사회학자 조형근이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류이근 기자
―체로 걸러지기 전 불평등의 심각성을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코로나 팬데믹 시기 학생들의 학습권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 줌(Zoom)을 통한 원격 수업이 일반화했다. 학습 손실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지 논의가 이뤄졌다.
그때 동네 협동조합 책방에서 알바했던 전문대생이 있다. 이 친구는 실습해야 하는데 줌으로는 안 된다고 했다.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주변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사로 본 적도 없다. 전문계 대학과 고등학생들이 자격증 따서 직장을 얻어 생활해야 하는데 학교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각자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당사자와 가족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몰랐다. 관심이 없었다.
수능 만점자가 서울대 의대를 못 간다는 게 뉴스로 크게 나온다. 그걸 읽고선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하면서 다들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서울대 의대와 소위 ‘인서울’(서울에 있는 대학) 그다음에 ‘지거국’(지역거점국립대)을 다 합쳐도 전체 대학 정원의 30%에 불과하다. 나머지 70% 이상은 그런 학생들이 아니다. 요새 인서울 상위 몇 개 대학에 온통 사회의 관심이 쏠려 있다. 반면에 전문대생이나 전문계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는 의제화되지 않는다. 저는 이게 큰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지하철 시위를 많이 해왔는데 비난도 컸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시위해왔다. 지난 한 달 사이 장애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인터뷰를 했다. 지역에 사는 보통의 장애인들이다. 이분들이 전장연 시위를 얘기하면서 ‘너무 잘한다, 고맙다’고 하더라.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대충 알던 것과 정말 다르다. 장애인 콜택시 부르면 실제 2~3시간 만에 온다. 그래서 포기하기도 한단다. 마트 장애인 주차장에 가면 물건을 가득 쌓아 놓는 곳도 많다. 이분들에겐 생활인데 정말 이동권 문제가 심각하다. 그걸 알린 전장연 시위를 지지한다는 거다.
소위 동정적인 시민들조차 출근길을 막는 전장연 시위에 반발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욕을 먹으면서까지 격렬하게 싸웠으니까 그분들의 요구가 들린 거다. ‘합리적’으로 요구했다면 절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사자의 역량 문제로 보면 전장연은 불평등과 차별에 강하게 맞서 싸우며 성취를 만든 보기 드문 사례다. 하지만 많은 경우 불평등을 겪는 당사자들은 이렇게 싸우지 못한다. 자신을 조직하지도 못한다. 어떻게 보면 상위 중산층 시민들이 바라는대로 유순하게 요구하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잘 안 들린다.”
지난 15일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 역사 안에서 침묵시위를 하던 전장연 활동가가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김채운 기자
―불평등을 논하면서 가장 왜곡된 담론이나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불평등이 심해졌다’고 하면서 곧잘 ‘우리 때는 개천에서 용이 제법 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이런 얘기를 하는 분들은 대체로 나름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다. 틀린 주장은 아니다. 통계적으로도 입증된다. 과거보다 계층 상승 이동이 줄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습관화하고 불평등 문제의 중요한 의제로 다뤄지는 데 최소 두 가지 심각하게 고려할 게 있다.
첫째는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하는 ‘나때’는 사실 전무후무한 고도 성장기였다. 경제가 매년 10%씩 성장했고 산업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 농민이 블루칼라가 되고 블루칼라가 화이트칼라가 되는 때였다. 그 효과로 ‘개천 용’들이 나왔다. 그런데 집안이 어려웠지만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간 뒤 고시에 붙거나 좋은 직장을 얻어 성공했다는 식이다. 개천 용 발탁 장치들이 옛날에는 잘 작동했지만 이제는 안 된다는 거다. 사실 엘리트를 만들어내는 장치의 특징과 고도성장기가 우연히 일치했던 것이지 인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니다.
예측 가능한 미래에 그런 식의 고도 성장 사회가 다시 오지 않는다. 개천 용 발탁 장치를 어떤 방식으로 수선한다 해도 신화는 재생되지 않는다.
둘째는 누가 이런 얘기를 하는지 봐야 한다. 명문대를 나와 성공한 ‘86세대’들이 주로 한다. 80년대에 대학이 급팽창하면서 진학자가 많이 늘었다 해도 80년대 말 2년제까지 다 합쳐 대학 졸업자는 고교 졸업생의 30%에 불과했다. 그중 인서울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이 몇 프로(%)나 되겠나. 개천 용은 그들만의 서사다. 나머지는 평생 용이 된 적 한 번 없이 그냥 계속 개천에서 살았다. 그 이야기는 사라졌다. 저는 사라진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본다. 대부분이 그 가운데 산다. 그런데 특권화한 상위 중산층의 서사 혹은 거기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주로 한다.
이런 식으로 불평등 문제가 자꾸 곡해되고 있다.”
―불평등을 바라보는 시각차도 큰 거 같다.
“우리가 맞닥뜨린 심각한 문제다. 두 가지 굉장히 다른 해석이 있다. 보수 쪽에서 많이 얘기하는 것 중 하나가 한국인들이 굉장히 평등 지향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강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고도성장의 동력이 됐다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심하게 질투하는 게 문제라는 식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세계에서 불평등을 가장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거다. 나름대로 객관성이 있다. 60여개 나라를 대상으로 1980년대부터 조사한 세계 가치관 조사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탈물질주의적으로 되는 기본 가정이 맞지 않는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과 싱가포르다. 80년대부터 1인당 국민소득(GDP)이 계속 올라가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 물질주의는 더 강화하고 있다. 동일한 노동을 했을 때 성과 차이에 따른 보상의 격차를 불평등하게 주는 게 좋다는 응답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능력에 따른 보상의 격차가 클수록 공정하다는 인식은 위에서 말한 평등주의적이라는 것과 상반된다.
두 믿음 체계는 완전히 다르다. 사실 이 두 가지가 섞여 있다. 한국인은 불평등을 옹호한다. 보수가 말하는 소위 한국인의 평등주의라는 것은 불평등한 보상을 갖는 과정에서 경쟁 절차가 공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요즘 말로 하면 불평등이 아닌 공정 이슈다. 한국인은 공정성 이슈에 굉장히 민감하다.
결과적으로 평등에 관심이 많은 게 아니고 공정한 경쟁의 결과로 나타난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멘탈리티(심리 상태)를 갖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경로 의존성에서 비롯됐다.
한국에서는 개천 용 신화가 정당성을 얻은 모델이 되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성공했다고 믿는다. 인과 관계도 없고 우연이었으며 그 시효가 이미 다 했다고 생각하는 모델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모델을 믿는다. 그 모델로 자원을 불평등하게 분배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모델이 가진 정당성이 뭔가? 이를테면 모두에게 기회의 평등을 줬고 입시라는 평등한 제도를 통해서 성공했다고 믿는다. 다른 걸 믿을 수 없는 나라에서 가장 깨끗하고 정당한 성공의 방정식(시험)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아니라고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시기의 역사적 경험을 갖고서 이렇게 불평등해진 지금의 문제를 대처할 수 없다. 개천 용 제도를 잘 다듬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불평등을 우리가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사회 심리적 기제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
“아직도 고도성장의 기억을 갖고서 그 시대의 표준과 기대 지평에 맞춰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빚어지는 시차가 심각하다. 계속해서 더 상승해야 한다는 어떤 상승 서사에 사로잡혀 있는 게 문제다. 상승의 꿈 같은 것이 우리에게 내면화했다.
상승 서사의 가장 큰 특징은 불평등 문제를 개인적 상승 이동의 가능성 문제로 바꿔버리게 된다. 불평등을 어떻게 줄일 것이냐가 아니라 밀물이 모든 배를 띄운다는 생각처럼 어떻게 파이를 키울 것이냐로 본다. 20세기 한국 사회가 그 노선을 걸었고 그 서사에 몰두했다. 일정 부분 성공을 거뒀다. 문제는 다 같이 뜨긴 했지만 수직적으로 불평등한 사회가 됐다. 누구는 초호화 크루즈선을 탔고 누구는 돛단배를 또 누군가는 뗏목을 탔다.
김대중 정부 때 민주적 시장경제론에서부터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좋은 시장을 만들어서 잘 성장할 거냐로 접근했다. 자신들이 보수 우파보다 더 잘 성장시킬 수 있다고 했다. 시장과 민주주의는 같이 가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잘하면 시장 경제가 잘된다고 봤다. 이런 사고방식이 계속 작동해왔다. 그 점에서 한국 사회가 불평등 문제를 불평등 자체로 접근해 본 적이 별로 없다. 불평등보다는 위로 올라가는 과정이 정당했느냐, 위로 올라갈 기회가 얼마나 많은가를 주로 이야기했다. 수직적 불평등이 얼마나 심해졌는지 그 기울기가 얼마나 되는지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다.
불평등 이슈를 독립적으로 다뤄보지 못한 것이 문제다.”
지난 1일 부산 신항 한진부산컨테이너터미널에 접안한 독일 해운사 소속 컨테이너선 ‘레버쿠젠 익스프레스’가 하역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수출을 중심으로 1970~80년대 고도성장했다. 안태호 기자
―능력주의가 어떻게 불평등을 정당화하는지 궁금하다.
“능력주의가 지금처럼 구조화한 이유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 명문대와 고시와 같이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시험을 거쳐 검증받은 엘리트들이 큰 보상을 가져가는 시스템을 통해서 한국이 성공했다는 대중적 신화가 있다. 소위 능력주의 엘리트들이 지위, 소득과 부에 대한 정당성과 자부심이 매우 큰 데는 실력과 능력으로 정당하게 얻었다고 강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한국 사회에서 잘 얘기하지 않는 부분이 노동자들에 대한 것이다. 1960~70년대 산업화를 거쳐 80년대 숙련 노동자들이 조직되고 협상력을 갖게 된다. 사회의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한다. 문제는 이 힘과 자원을 갖고서 무엇을 했냐는 거다. 특히 대기업 숙련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과 지위를 올리는 데 이 자원을 썼다. 함께 이걸 만들어온 작은 기업들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더불어 상승해 가는데 이 자원을 거의 쓰지 않았다. 결국 끝까지 기업별 노조 체제를 (산별 체제로) 바꾸지 않았다.
노동 운동사에서 빛나는 투쟁 가운데 하나가 1990년대 현대차의 성과 분배 투쟁이었다. 아주 훌륭한 투쟁이었지만 동시에 숙제를 안긴 투쟁 가운데 하나다. 현대의 성공이 자본의 힘으로 얻은 게 아니라 노동자가 열심히 일해서 얻어낸 거라고 투쟁을 벌였다. 그게 성공했다. 현대차가 한국을 대표하는 노조가 되게끔 한 엄청난 동력이었다. 동시에 현대차 노조와 얽혀 있던 금속연맹의 수많은 다른 노동자들이 함께 ‘올라가지’ 못했다. 현대차 노조가 열심히 해서 정당하게 얻은 성과이지만 그게 현대차 노동자만 노력해서 얻은 성과가 아닌데 함께 하지 않은 것이다.
시험을 통과해 등용된 입시 엘리트나 대기업을 통해 숙련을 획득한 노동자들이 ‘나만 잘나서’ 얻은 성과가 아니고 시대가 만들어낸 거다. 결국은 (혼자) 사다리를 올라갈 게 아니라 계급이 올라갈 수 있도록 고민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상승의 서사 속에 함께 했던 노동운동의 핵심적 일부가 빠지게 됐고 오늘날 불평등이 구조화되는 데 큰 원인이 된 게 아닐까.”
지난 2012년 11월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해고된 최병승(왼쪽)씨와 천의봉씨가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는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김규남 기자
―불평등의 적정한 수준이란 게 있을까. 선을 그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최소한의 원칙이나 강령이란 게 있는지 궁금하다.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사회 구성원 사이에 연민이 아니라 연대가 가능한 수준에서 불평등이 있어야 한다. 물질적 격차가 어느 정도 돼야 용인 가능한지, 그 절대적 수준을 정할 순 없다. 하지만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사회 주체들 사이에서 연대가 불가능하고 연민만 가능하다.
불평등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하거나 싸울만한 자원마저 박탈당하고 연민의 대상이 되는 수준이 되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어진다. 그러면 시혜로만 가능하게 된다. 아직 그 수준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그 직전까지 와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수직적 사회의 밑바닥에 있지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꿈 자본’을 각자 갖고 있었다. 아래쪽에서 그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건 청년 세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계급의 문제다. 하층 계급 청년들에게 꿈 자본은 거의 소진됐다. 희망이 없다는 얘기다.
불평등에 불평하면서 공정성 이슈에 분노하고 화내는 사람들은 주로 상위 중산층 아래 있는 분들이다. 상위 중산층에 끼고 싶은데 끼지 못할 것 같은 불안에 분노한다. 상위 30%나 40%에 드는 사람들이 10~15%의 특권 중산층에 들어가지 못해 화내고 싸우는 이슈가 주로 한국 사회의 불평등 이슈가 되고 있다.
물론 그런 이슈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해 전체적으로 고루 나누자는 이슈로 옮겨가야 한다. 하위 50%가 적어도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자신들의 이슈를 만들어내고 ‘우리를 봐달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격차가 너무 커져 스스로 의제화를 못하게 되면 불평등 이슈가 이슈화하지 못한다. 지식인들이 말해봐야 호응이 없는 메아리다. 정작 자신들은 특권 중산층에 속해 있으면서 ‘불평등 문제가 너무 심각해’ 라고 떠드는 데 그칠 수 있다.”
―불평등이 어느 한 진영의 의제가 아닌데 보수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다. 불평등 해소나 개선에 소홀히 한다는 게 보수의 사상적 관점과 가치와도 충돌하거나 모순되는 게 아닌가.
“보수는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거로 본다. 지난 200년간 보수주의 철학은 에드먼드 버크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있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능력이나 성향 측면에서 불평등하다고 본다. 자연적 사실로 보기 때문에 보수주의가 불평등 해소에 진보보다 덜 적극적인 건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가 전형적인 정통 보수주의라고 보는 철학의 한 축은 공동체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사회를 보는 기본 축이다. 소위 공동체 보수주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다. 그런 면에서 보수주의는 공동체를 깨뜨릴 만큼의 불평등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19세기 말 영국의 디즈레일리 시절 보수주의가 복지에 나서게 되고 노조를 합법화했다. 공동체 유지를 위한 보수주의의 기본적인 입장이 있어 가능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도 마찬가지다. 보수주의가 복지에 나서게 되는 바탕에는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게 깔렸다.
지난해 5월 취임 선언하는 윤석열 대통령. 공동체의 균열을 막는 정통 보수의 가치가 시장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쪽으로 변질되면서 불평등 개선에 관심마저 크게 줄었다. 공동취재사진
오늘날 보수주의가 바뀌었다. 주류 보수주의가 1950~60년대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공동체 보수주의가 아닌 개인 보수주의로 변했다. 원래 공동체 보수주의 관점에서 시장은 위험한 것이다. 공동체를 깰 수 있어서다. 하지만 오늘날 보수주의는 시장을 찬미한다. 시장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장치이고 불평등 문제가 있다면 시장이 이미 교정장치를 만들어 놨다고 본다.
본래 보수주의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사회의 부작용을 제어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자처한다. 또한 인간이 완전하지 않다고 보기에 굉장히 겸손하다. 어느 순간 겸손을 잃고 시장 만능주의 즉 시장에 맡기면 다 된다는 강렬한 우익의 신념이 돼서 시장 유토피아를 만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보수가 하이에크가 아닌 버크나 디즈레일리를 따르면 좋겠다.”
―진보가 불평등에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자꾸 진보로 오해받고 있는 중도 보수나 자유주의 세력, 정치 현실에서는 민주당 계열이 있다. 이들이 90년대 말 이후 세 차례 집권했다. 그 사이 오늘날과 같이 불평등 문제가 심각해진 데 이 진영의 책임이 더 크다. 이들은 주로 자산 엘리트가 아닌 능력주의 엘리트들이다. 대체로 명문대 나오고 자신들이 성공한 개천의 용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이쪽에 많다. 재벌과 정경유착 등 잘못된 불평등한 사회를 타파하고 진짜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승리하는 제대로 된 세상,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자신들이 보수보다 더 유능하다고 생각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고쳤고, 참여정부에서는 비전 2030의 핵심 논리로 생산적 복지나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을 명시적으로 표현했다. 보수도 안 한 게 아니지만, 능력주의 경쟁으로 한국 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신념은 이 진영이 더 크게 퍼뜨렸다.
특히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에 반칙과 특권 때문에 망했다고 보고 제대로 된 진짜 경쟁을 할 수 있는 시장경제를 만들어보자는 게 개혁의 주된 담론이었다. 어떻게 보면 능력주의의 확산에 결정적이었다. 그게 정당하게 보였다. 소액주주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진영이 좀 심할 정도로 올인했던 게 사실 그때 세계적 추세기도 했다. 이 담론에 엄청난 정당성이 부여되었던 게 불행이기도 하다. 큰 틀에서 보면 실패했다고 본다. 이제 거기서 좀 탈출하면 좋겠다.”
지난 2000년 4월 현대자동차 노조가 구조조정반대와 해외매각저지를 위한 부분파업에 돌입한 가운데 울산시 북구 양정동 현대자동차 본관 앞에서 노조원 5천여명이 조합원 결의대회를 갖고 있다. 곽윤섭 기자
―재분배를 통해 사후 시장에서 빚어진 불평등을 보완하는 것보다 사전에 시장에 개입해 불평등을 축소하자는 쪽에 더 주목하시는 것 같다.
“한국은 아직도 복지가 부족한 나라다. 복지를 더 늘려야 한다. 특히 소득과 자산 조사와 연계되지 않은 보편 복지가 정말 중요하다. 그게 불평등 축소의 중요한 기제다. 그런데 보편 복지로 접근해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이 있다. 시장에서의 불평등이 너무 심각하면 재분배로 교정하기도 어렵거니와 이 과정에서 복지로 해결되지 않은 존엄성이란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보편 복지가 굉장히 좋지만 사람에겐 좋은 일자리를 통해서 얻는 자존감이란 게 있다.
그런데 노동시장은 심각한 이중구조에 빠져 있다. 약 15% 정도 되는 ‘1차 노동시장’으로 대기업이나 공공 부문의 좋은 일자리가 있고 나머지는 플랫폼 노동 등 굉장히 불안정한 노동이 있다. 지난 정부가 후자를 위해 애썼던 소득주도성장 식으로 소득을 보전해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보다 먼저 일자리 자체가 더 좋아져야 한다. 임금 격차가 덜 나고 사회적으로도 좀 더 인정받는 일자리가 되도록 지원하는 게 훨씬 더 좋다고 본다.
노동시장 불평등은 다른 나라(서구 선진국들)보다 더 심한 편이다. 이걸 복지란 방식으로 끌어올리기가 힘들다. 노동의 힘이 더 강해져야 한다. ‘2차 노동시장’에 속하는 배제되고 주변화한 불안정 노동이 강해져야 한다.
자본이 반발하겠지만 정치가 용기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수습할 수가 없다. 미국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하면서 일자리를 만들고 돈만 푼 게 아니라 노조를 합법화하고 노동에 힘을 실어줬다. 노동의 힘을 키워 불평등을 완화했던 사회정책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뉴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거고 이후 수십 년간 민주당과 노동 간 ‘뉴딜동맹’이라는 걸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이 포지션(위치)을 취하려는 정치 세력은 노동과 함께 조직을 만들고, 노동이 힘을 갖고서 소리를 내게끔 해야 한다.
시장에서의 분배 불평등을 교정할 수 있게끔 정치가 힘을 발휘하지 않는 이상 오늘날 한국에서 불평등 담론을 뒤집을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류이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ryuyigeun@hani.co.kr, 김효진 보조연구원
사회학자 조형근은 ‘키워드로 읽는 불평등 사회’를 펴냈고 앞서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우리 안의 친일’ 등을 썼다. ‘한겨레’에 ‘조형근의 낮은 목소리’를 연재 중이다. 그는 한림대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 대학과 지식 생산 체제의 문제를 절감하며 2019년 사직한 뒤 동네 책방을 공부방 삼아 자유롭게 글 쓰며 강연하는 독립 지식인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 14일 사회학자 조형근이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류이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