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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헤리리뷰

“한국형 사회적 합의 모델로 ‘노동 존중 선진국’ 밑돌 놓자”

등록 2017-11-08 10:00수정 2017-11-09 17:34

[제8회 아시아미래포럼]
기고/장홍근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년 대화 ‘동원·배제형’ 기울어
단기이익 추구 신뢰 손상 일쑤
정부가 먼저 ‘합의 집착’ 벗고
노·사 각각 대표성 확보 시급
합의체제는 새 노동정치의 초석
장홍근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장홍근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국 사회는 역사적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촛불시민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정초해야 할 과업에 직면해 있다. 한국 사회 패러다임 전환의 핵심에 노동시장과 노사관계를 포괄하는 노동체제의 혁신이 자리잡고 있다. 경제사회 주체간의 사회적 대화와 합의는 새로운 노동체제의 구축과 지속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적 1987 노동체제를 해체하고 재구성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사회적 대화와 합의가 필요하다. 또 저성장 경제가 ‘뉴노멀’(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의 새로운 경제질서)로 된 상태에서 4차 산업혁명의 도전에 대한 대응 전략 마련 차원에서도 사회적 대화와 타협은 필수불가결하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로봇 등으로 뒷받침되는 초고도 기술혁신 시대에 어떻게 일자리를 창출하고 나누며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할 것인지 등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이해갈등 조정과 정책 협의 시스템 곧 사회적 합의 체제의 형성은 미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요건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합의의 정치는 199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는 1980년대에 급성장한 노동운동에 대한 국가의 대응 프로젝트 성격이 강했지만 이후 중앙 노동정치의 주요한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의 노사관계 및 노동시장 관련법 개정 시도, 1998년 2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2·9 사회협약), 2009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합의(2·23 합의), 2015년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9·15 합의)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지난 20여년간 한국의 사회적 대화와 합의는 초창기의 자율·포괄형에서 점차 동원·배제형으로 변해왔다. 노사 단체의 취약한 대표성과 조직·정책 역량 역시 정부가 주도하는 사회적 대화와 합의에 일조하였다. 1999년 노사정위원회법이 제정되는 등 사회적 대화 기구의 제도화 수준은 높아졌지만 실질적 합의는 오히려 약화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노사정 모두 단기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근시안적 전략을 구사했고, 어렵게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유리한 것만 취한 다음 팽개침으로써 사회적 대화와 합의의 전제인 신뢰를 손상하는 일이 빈번했다. 2014~16년에 걸쳐 진행된 9·15 합의와 파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국가가 주도하는 동원형 사회적 대화와 합의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과거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노동정치의 초석을 놓아야 할 때이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노동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노사정 주체들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한국형 사회적 합의 체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먼저 변해야 한다. 지나치게 합의에 집착하거나 주도해서는 안 된다. 또 일방적으로 추진하기 부담스러운 정책 현안에 대화와 타협의 외피를 입혀 이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사회적 대화와 합의를 이용하는 행태를 버려야 한다. 사회적 합의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려면, 대화와 타협을 위한 신뢰 곧 사회적 자본의 축적과 합의의 성실한 이행이 중요하다. 사회적 합의에 있어 노와 사의 대표성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재 사회적 합의 체제의 외곽에 있는 민주노총은 물론 비정규직, 여성, 중소영세기업, 자영업자 등이 주체로 참여해야 하며, 책임있는 경제사회 주체로서 필요한 조직과 정책 역량을 키워야 한다.

복지·노동 선진국들은 사회적 합의의 전통이 강하다. 대표적인 복지국가인 스웨덴이 살트셰바덴 협약(1938년)을 통해 계급 대타협을 이루어내고 이후 안정된 노사관계와 사회복지 체제를 바탕으로 선진국으로 도약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 역시 1982년 바세나르 협약과 이후 일련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유연하면서도 안정된 노동시장과 노사관계를 형성해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유럽의 변방이었던 아일랜드도 1990년대 이래 몇 차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짧은 기간에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유럽연합(EU)을 이끄는 독일이나 프랑스는 사회적 대화와 타협이 정치경제 및 사회의 기본 작동원리로 배태되어 있는 사회이다. 선진국의 역사가 보여주듯, 한국이 명실상부하게 노동존중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려면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형 사회적 합의 모형을 구축하여 제대로 작동시켜야 한다.

장홍근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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