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케이티(KT) 서울 아현동 통신국사의 통신구 화재 현장에서 통신 케이블을 꺼내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많이 당황하셨죠?”
오늘 인사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지난 24일 일어난 케이티(KT) 아현동 통신구 화재와 그에 따른 통신대란 사태로 입에 단내가 나게 뛰고 있는 통신 담당 기자 김재섭입니다.
“병원에서 통신장애로 의료보험 가입 확인이 안 된다며 접수를 받아주지 않아 아픈 몸으로 무작정 기다렸다.” “현금이 없는데 카드결제가 안 돼 편의점에서 물 한 병 사먹지 못했다.”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서서 앞사람의 통화가 빨리 끝나기를 바랬다.”….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을 자처하고 차세대 이동통신인 5G 첫 전파 발사(12월1일)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수백만명이 실제로 경험한 상황들입니다.
이번 사태로 불편을 겪었거나, 재산상의 피해를 봤거나, 제때 병원을 이용하지 못해 고초를 겪은 분들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이번 사태를 보며 ‘지금 터져서 그나마 다행이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율주행차와 원격의료 같은 서비스가 널리 이용되는 상황에서 이번과 같은 사태가 터졌다면 어땠을까요. 수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기도 하는, 정말로 재난영화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통신 전문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번 케이티 아현동 통신구 화재 건은 ‘화재’와 ‘통신대란’을 분리해서 봐야, 정부와 사업자, 이용자 모두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화재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될 수준의 통신대란이 발생했고, 서울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수백만 명이 불편을 겪고 피해를 봤다는 점입니다.
케이티의 설명대로라면 아현국사는 중요도에 따라 A~D등급으로 분류되는 방송통신시설재난계획에서 가장 낮은 D급으로 분류돼 간부급 책임자와 24시간 상주근무 체계도 없는 ‘조그만’ 국사(통신장비가 운용되는 곳)입니다. 그런 통신구에서 불이 났는데, 서울 한복판이 ‘디지털 암흑’ 상황으로 돌아간 꼴입니다. 더욱이 화재가 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동케이블을 사용하는 유선전화와 카드결제망은 아직도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통신망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용하는 각종 정보통신 서비스를 가능하게 해주는 가장 밑바탕의 물리적인 시설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여기서 장애가 발생하면, 인터넷·인터넷텔레비전(IPTV)·이동통신·카드결제·온라인게임·국가행정정보서비스·클라우드·인공지능·자율주행·내비게이션 등 통신망을 통해 제공되는 모든 서비스가 헛것이 됩니다.
당연히 안전하게 관리돼야 하겠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번에 화재가 발생한 아현국사의 경우, 실제로는 인터넷 집중국이었다고 합니다. 서울 시내 상당부분을 커버하는 인터넷 통신망 설비가 이곳에 집중돼 있었다네요. 당연히 ‘C급’으로 분류해 우회 통신망 확보에 필요한 백업체계와 화재 예방시설을 갖추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지도·점검을 받아야 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전국에 D급 시설이 835곳에 이른다고 하는데, 아현국사만 이랬을까요.
이번 사태는 통신 비전문가들이 ‘낙하산’으로 최고경영자로 내려와 생색 안 나는 통신 공공성보다 수익성 위주의 경영에 치중한 결과라는 지적도 많습니다. 참고로 케이티 황창규 회장은 성과급 등을 합쳐 해마다 25억원 가까운 급여를 받아갑니다. 에스케이텔레콤(SKT)와 엘지유플러스(LGU+)는 사정이 다를까요. 통신사들도 눈치가 보였던지, 오늘(1일) 0시에 있었던 5G 첫 전파 발사를 흥행시키려고 계획했던 최고경영자 주관 기자간담회(에스케이텔레콤·엘지유플러스 28일, 케이티 29일)를 일제히 취소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케이티 노조가 파업을 결의했다는 소식에 “국가전복세력”이라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통신망 관리 소홀을 국가전복 행위로 본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의 말대로라면, 통신망 관리를 소홀히 해 이번 사태를 일으킨 통신사 경영진 역시 국가전복세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번 사태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고’이지만, 이미 일어난 만큼 ‘차세대 이동통신+4차 산업혁명’ 시대의 초석을 굳건히 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만큼 지난 27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중심으로 민관 합동으로 꾸려진 ‘통신재난 관리체계 개선 태스크포스’가 해야 할 역할이 막중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과 피해자들에 대한 철저한 보상을 요구하는 시민행동도 필요해 보입니다. 정부 관료에 대한 채찍으로는 대통령의 관심이, 통신사 경영진에 대한 압박으로는 통신 공공성을 외면한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게 최고입니다.
김재섭 기자
j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