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취재차 미국 시애틀에 갔다가 마이크로소프트(MS) 리서치센터 고위직으로 있는 한인 수학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대뜸 “한국 기자들은 수학 공부 좀 더 해야 하겠다”고 했다. “신문별 논조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신문에서 어제와 오늘의 논조는 같아야 하는 것 아니냐.” 온라인으로 한국 신문을 자주 보는데, 어제와 오늘의 논조가 다르고, 같은 기사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등 한심할 때가 많다고 했다. “독자들이 별 문제 의식 없이 신문을 읽는 게 신기하다”며 “수학을 공부한 사람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도 했다.
일부 언론의 5세대(5G) 이동통신 요금제 관련 기사를 보다 문득 이 수학자가 떠올랐다. 애초 3월28일로 잡혔던 5G 이동통신 상용화 행사가 미뤄진 이유는 단말기가 준비되지 않아서다. 그 전에 5G 스마트폰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됐던 삼성전자가 갑자기 “안정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면서 상용화 행사도 미뤄졌다는 게 업계 정설이다. 상용화에 필요한 3가지 가운데 이동통신망은 지난해 12월1일 이미 전파 발사를 시작해 반쪽짜리도 안되는 수준이나마 돌아가고 있고, 요금제를 포함한 이용약관 준비도 문제가 없었다.
문제의 일부 언론들은 여기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에스케이텔레콤(SKT)이 신청한 5G 요금제를 인가하지 않고 반려한 것을 교묘하게 끼워넣고 있다. 정부가 에스케이텔레콤이 인가 신청한 요금제를 반려한 것을 5G 이동통신 상용화가 미뤄진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으며, 이러다가 세계 최초 상용화 타이틀을 미국에 빼앗길 수도 있다고 이어간다. 미국 버라이즌이 5G 요금제를 기존 엘티이(LTE) 요금제보다 10달러(1만1천원) 가량 높게 책정됐다는 것도 고명처럼 얹는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상황에서 읽으면 ‘과기정통부가 에스케이텔레콤의 5G 요금제를 인가하지 않고 반려한 게 단말기 출시 지연과 함께 5G 이동통신 서비스 상용화 일정을 미뤄지게 했고, 이 때문에 세계 최초 상용화 기록을 미국에 빼앗길 수도 있다’고 이해하기 십상이다. 대부분 제목이 5G 요금제 중심으로 뽑혀 있어 더 그렇다.
먼저 ‘팩트체크’부터 해 보면, 5G 요금제는 정부가 아니라 사업자가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에스케이텔레콤은 이동통신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지정돼 있어 새 요금제를 내놓을 때마다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과기정통부의 인가를 받게 돼 있다. 과기정통부는 에스케이텔레콤의 요금제가 시장약탈적이거나 이용자 권익을 침해하지 않는지, 불합리하지는 않은지 등을 살펴 인가 여부를 결정해 통보한다. 이를 위해 소비자단체를 포함한 각계 전문가들로 이용약관심의자문위원회를 구성해 미리 심의하게 하는 절차도 운영하고 있다.
후발 사업자인 케이티(KT)와 엘지유플러스(LGU+)는 역시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이런 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이용약관 신고만 하면 된다. 물론 이들도 신고 전에 과기정통부의 정책담당자들에게 내용을 알려주고 적절성 여부에 대한 의견을 미리 들어보는 경우가 많다.
과기정통부가 에스케이텔레콤의 요금제를 반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속내가 있다. 그동안은 미리 조율한 뒤 인가 신청서를 접수해 반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에스케이텔레콤이 사전 조율 없이 인가 신청을 했고, 과기정통부는 약관심의자문위에 넘겨 심의한 결과 부적절하다고 판단돼 반려한 것이다. 과기정통부 이태희 통신정책국장은 “에스케이텔레콤이 일방적으로 인가 신청서를 접수했으니 정부는 인가하든지 반려하든지 결정해야 했는데, 약관심의자문위 심의 결과 ‘고가 중심으로 설계해 이용자 차별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많아 반려했다. 과기정통부가 왜 에스케이텔레콤이 인가 신청한 5G 요금제를 반려했냐고 따지는 것은 전기통신사업법과 과기정통부의 역할을 모두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이 미국 버라이존의 5G 요금제가 엘티이 요금제보다 1만원 높게 책정됐다는 것을 지렛대로 삼는 것도 뜬금없다. 얼핏 미국은 5G 요금제를 높게 책정하게 두는데, 우리는 왜 높게 책정한 것을 뭐라 하느냐고 대신 항변해주는 것 같아 보인다. 이동통신 사업자 편을 자처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어 보인다. 예전에 시민단체들이 정보통신부를 향해 ‘이통사 마케팅 조직’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일부 언론이 자청하고 있는 꼴이다.
더욱이 5G 이동통신 서비스는 상용화된다 해도 당분간은 이용자들에게 별 쓸모를 주지 못한다. 5G 이동통신망 구축이 거의 안돼 있는데다, 5G 이동통신의 장점을 활용할 만한 서비스와 콘텐츠도 준비된 게 없다. 5G 스마트폰을 사용해도 열에 아홉 지역에서는 엘티이나 3세대(WCDMA) 이동통신망으로 연결된다. 몇 해 전 참여연대가 이동통신 요금인하 운동 차원에서 이동통신 원가 공개를 요구했으나 이통사들이 “이동통신 요금은 원가가 아니라 이용자에게 주는 가치를 기준으로 정한다”며 공개를 거부해 소송으로 이어진 바 있다. 당시 이통사들이 주장했던 ‘이용자에게 주는 가치’를 잣대로 하면, 반쪽짜리도 못되는 통신망에다 서비스·콘텐츠도 없는 5G 이동통신 서비스는 당분간은 거저 제공되는 게 옳다. 5G 이동통신망 투자비를 운운하려면, 감가상각이 다 끝나 이론상으로는 원가가 제로(0원)인 2~4세대 이동통신 서비스는 무료화해야 한다.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5G 이동통신이 4차 산업혁명 흐름과 맞물리며 기존 산업을 혁신해 경쟁력을 높이고 일자리 창출이 극대화되게 하기 위해서는 일반 이용자 대상(B2C)이 아닌 기업을 대상(B2B)으로 추가 매출을 창출하게 해야 한다. 3세대(WCDMA)에서 4세대(LTE)로 전환할 때처럼, 일반 이용자 대상 5G 요금제를 높게 만든 뒤 기존 가입자를 5G 가입자로 전환시키는 방법으로 매출을 손쉽게 늘릴 수 있게 하면, 산업 혁신 구실은 사라지고 가계 통신비 부담만 키우는 부작용을 낳을 뿐이다.
거듭 역설하자면, ‘세계 최초 상용화’는 한국 산업 혁신과 이용자 편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김재섭 기자
js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