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회사에서 직원이 야근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첫 직장인 아이티(IT) 개발업체에서 프로그래밍 개발자로 일을 시작했는데, 1년이 넘도록 야근에 따른 연장근로수당이나 주말 출근에 대한 휴일근무수당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포괄임금제 때문입니다. 평일은 밤 10시 넘어서까지 일하기 일쑤였고, 퇴근 후에도 회사 대표가 새벽 2~3시에 잠을 깨워 업무를 지시했어요. (장시간 노동으로) 건강이 매우 나빠졌습니다.”
지난달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 119’에 접수된 한 중소 아이티 기업 직원의 제보다. 최근 대선 후보 시절 ‘주 120시간 노동’ 발언을 했던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의 노동 정책 기조를 놓고 아이티 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주 52시간 상한제 도입 이전 ‘구로의 등대’, ‘판교의 오징어배’로 비유되던 크런치 모드(장시간 격무)가 새 정부에서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 때문이다. 지난해 7월에서야 이 제도가 적용된 5인 이상~50인 미만 중소업체의 직원들은 아직까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주 52시간 상한제가 시행 1년도 안 돼 사라질 것을 걱정하는 분위기다.
윤 당선자는 지난해 12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주 52시간 상한제는) 이미 정해져서 강행되는 근로조건이어서 후퇴가 불가능하다”면서도 “노사 합의를 통해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정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중소기업계의 요청을 잘 고려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공약집에서도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 최대 1년으로 확대 △연간 단위 근로시간 저축계좌제 도입 △연장근로시간 특례업종에 신규 스타트업 포함 △전문직·고액연봉자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 등 ‘근로시간 유연화 확대’를 앞세우고 있다.
아이티 기업 노조들은 당분간 ‘여소야대’ 국회 상황 때문에 법 개정은 어렵더라도 고용노동부의 시행령 개정이나 근로감독 약화 등으로 주 52시간을 넘어선 장시간 노동이 늘어날 가능성을 우려했다. 2년 전 회사의 특별연장근로 인가 신청을 막아낸 경험이 있는 차상준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장은 “2016년 넷마블 과로사 사건 등을 경험했던 아이티 종사자들 입장에선 (노동시간 단축에 역행해) 예전으로 돌아가는 정책 방향에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윤 당선자는 노사합의를 전제로 노동시간 유연화를 말하지만, (공약이 그대로 추진될 경우 노조가 없는 회사에서) 일개 직원이 회사의 장시간 근무 요구를 거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판교의 주요 아이티 대기업의 경우 2018년 이후 노조가 설립돼 그나마 주 52시간 상한제가 안정적으로 정착된 편이지만, 이들 기업 역시 여전히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에서 자유롭진 못 하다. 2020년 스마일게이트에선 노조 설문조사 응답자의 12.6%가 주 52시간을 넘겨 일한 것으로 나타났고, 카카오는 지난해 6월 노동부의 수시 근로감독에서 한달 동안 최대 118시간의 연장근로를 한 직원이 확인되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연봉 인상 경쟁에 불이 붙었던 업계 특성상 ‘고액연봉 근로자의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 공약에 대한 불안감도 이어지고 있다. ‘억대 연봉’을 받는 일부 개발자들이 주 52시간 상한제를 적용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약은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근로시간 적용제외) 제도를 반영한 것으로, 2019년 김병관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같은 취지로 대표발의한 ‘근로기준법 일부개정안’에선 국내 근로소득 상위 3%(2017년 기준 1억1556만원) 이내 근로자의 근로시간 제한 규정 적용을 제외하도록 했다. 이 기준대로라면, 지난해 직원 1인당 평균 급여가 1억1285만원(미등기임원 급여 제외·스톡그랜트 등 포함)인 네이버의 경우, 적지 않은 직원이 주 52시간 상한제 적용 대상에서 빠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가 없는 중소 아이티 기업 종사자들이 받게 될 타격은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주 52시간 상한제가 뒤늦게 시행된 데다 포괄임금제에 기반한 ‘장시간 공짜노동’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윤 당선자 공약처럼)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1년으로 늘릴 경우 가장 치명타를 입는 곳은 (포괄임금제가 많은) 아이티 업계 종사자들일 것”이라며 “특히 중소기업은 주 52시간 상한제가 시행되는 상황에서도 불법이 난무한데, 제도 자체가 무력화된다면 사업주들의 압박으로 이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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