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4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신기업가정신 선포식. 연합뉴스
총수가 있는 있는 자산규모 기준 상위 10대 재벌 대표기업들의 지배구조 상황이 전년(2021년)에 견줘 크게 나아진 게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자율 개선을 촉진하겠다며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공시 제도를 강화했지만, 집중투표제 및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 분리 등을 비롯한 미준수 사항이 전년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윤석열 정부는 재벌 개혁을 국정과제로 삼지 않아 앞으로 개선을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공시제도는 주요 대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경영투명성을 개선하도록 하겠다며 2017년 도입됐고, 2019년 자산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로 공시 대상을 넓히며 의무화했다. 올해부터는 자산 1조원 이상으로 대상이 확대됐고, 2024년에는 자산 5천억원 이상, 2026년에는 모든 코스피 상장사로 대상이 더 넓어질 예정이다. 공시의 핵심지표는 주주, 이사회, 감시기구 등 3개 분야 15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6일 <한겨레>가 10대 재벌 대표기업 10곳의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공시를 살펴본 결과,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곳은 한 곳도 없다. 삼성전자, 에스케이(SK), 현대자동차, 엘지(LG), 롯데지주, 한화, 지에스(GS), 한국조선해양, 신세계, 씨제이(CJ) 등 모두 미도입 상태다. 집중투표제는 이사 선임 시 다수 후보가 있을 경우, 의결권을 1인 혹은 일부 이사에 몰아줄 수 있도록 한다. 이를 통해 소수주주 보호를 위한 이사를 선임할 수 있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기구인 아이에스에스(ISS)는 집중투표제 도입을 위한 정관 변경에 찬성투표를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재벌 기업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 분리는 삼성전자(2018년)와 에스케이(2019년)만 이행 중이다. 두 회사는 “독립성과 투명성 강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엘지 등 나머지 8개 기업은 여전히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하고 있다. 각각 “역동적인 경영환경에 적시에 대응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서”(엘지), “급변하는 자동차 산업 및 경영환경에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대응”(현대차), “효율적 운영과 신속한 집행”(롯데지주) 등의 이유를 들었다. 또 에스케이, 엘지, 롯데지주, 한화, 지에스, 씨제이 등 지주회사들은 주총 4주 전에 소집 공고를 하지도 않았다.
미준수 사항 항목은 한화가 배당정책 연 1회 이상 주주에게 통보 미준수 등 6가지로 가장 많았다. 전년보다 하나가 줄긴 했다. 엘지와 씨제이는 전년보다 1개 줄어든 3개였다. 에스케이, 현대차, 지에스, 한국조선해양, 신세계 등은 전년과 같은 3개였고, 삼성전자는 2개로 전년 공시와 같았다. ‘환경·사회적 책무·기업지배구조개선(ESG) 경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실제 지배구조개선은 더딘 셈이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지배구조개선을 시장에 맡겨 자율적으로 개선하게 하는 게 실효성이 없다는 걸 보여준다”며 “정부의 지배구조 투명화 등에 대한 의지 표명과 제도 개선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김우진 서울대 교수(경영학)는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를 막기 위해 지배주주 지분율을 강화해도 빠져나가는 것처럼, 제도 문제라기보다는 이른바 ‘오너’라고 불리는 지배주주 의지가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총수 있는 10대 재벌 대표기업지배구조 핵심지표 미준수 항목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3월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가이드라인을 고쳐, 물적분할 등 소유구조 변경 시 주주보호 정책을 마련해 보고서에 쓰도록 했다. 지난해 엘지화학이 배터리 사업을 분리해 엘지에너지솔루션으로 물적분할하는 과정에서 엘지화학 주주들이 주가하락 등의 손실을 보는 등 소수주주 보호 대책이 미비하다는 여론에 따른 것이다. 금융위는 이를 통해 “기업 스스로 소액주주와의 간담회 개최와 배당 확대 같은 주주 환원정책 강화 등 주주 보호를 위한 정책을 마련해 주주와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10대 재벌 대표기업은 보고서 공시에서 구체적 내용 없이 “검토 중”이라고만 했다. 삼성전자는 “반대주주 권리보호 등 관련 정책이 마련돼 있지 않다”며 “구체적인 정책 수립을 중장기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다른 곳들도 “지속가능경영위에서 논의해 추진”(현대차), “다양한 방안 지속 검토”(엘지), “개선 방안 검토”(한국조선해양) 등 같은 태도를 보였다. 다만, 씨제이는 “신주인수권 부여 등 다양한 정책의 도입 가능성을 검토 중”이라며 한발 나아간 모습을 보였다.
김우진 교수는 “금융위가 소수주주 보호를 한다며 임시방편으로 대책을 내놓아 기업들도 그에 맞춰 대응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물적분할 시 반대주주 보호 대책을 약속했다. 당시 공약집에서 “기업의 성과와 과실이 자본시장에 참여하는 국민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물적분할 시 분할 자회사의 상장을 엄격히 제하고, 모회사 주주에게 자회사의 신주인수권을 부여할 것 등을 약속했다. 상장회사 주식을 25% 이상 취득할 경우 반드시 40% 이상을 공개 매수하도록 하는 ‘의무공개매수’ 도입도 약속했다. 하지만 새 정부가 ‘110대 국정과제’를 발표할 때는, 물적분할에 따른 자회사 상장 시 모회사 소액주주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정비하겠다고만 밝혔다.
이 때문에 새 정부의 소수주주 보호 대책 역시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김규식 기업거버넌스포럼 대표는 “윤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에는 기업구조개선과 소액주주 보호에 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국정과제에는 일부만 포함됐다”며 “금융위를 비롯한 정부가 자율적 규제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등은 최대주주 경영권 보호를 강조하고 있어 지배구조개선이나 소수주주 보호 정책이 후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소수주주들이 동원산업·동원엔터프라이즈 합병 비율이 총수 일가에 유리하다며 재산정할 것을 요구해 관철한 것처럼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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