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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산업·재계

재벌은 왜 총수가 죽어야만 승계가 이뤄질까?

등록 2017-11-18 09:35수정 2017-11-18 09:43

[토요판] 다음주의 질문
지난해 12월6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농단 의혹 사건’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국내 주요 재벌그룹 총수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12월6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농단 의혹 사건’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국내 주요 재벌그룹 총수들. 사진공동취재단
곽정수 경제에디터석 산업팀 선임기자 jskwak@hani.co.kr

현대자동차의 10월 중국 시장 판매 감소율이 10%대로 낮아지자, 다수 언론이 ‘사드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크게 보도했다. 하지만 정작 현대차는 밝은 표정이 아니다. 상반기 감소율이 50%를 넘었던 것에 비하면 회복세가 분명한데, 왜일까? 한 임원은 “중국 시장 문제는 사드 외에 중국 업체들의 가격·품질 경쟁력이 급성장한 요인이 겹쳐 있다”며 “사드는 단기간에 극복 가능하지만, 중국 업체와의 격차가 좁혀진 것은 근본적인 위협요인”이라고 털어놨다.

현대차의 표정이 어두운 데는 또 다른 숨은 이유가 있다. 바로 총수의 건강 문제다. 정몽구 회장은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국내외 사업장의 현황 파악, 임원 보고, 회의 주재에 이어 전세계 사업장을 연결해 궁금한 사항을 직접 확인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왔다. 하지만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지난해 초 그룹 시무식이 정 회장의 출근 지연으로 무산되면서 건강에 이상 신호가 포착됐다. 예년 같으면 한 해에 대여섯 차례씩 가던 해외출장도 지난해엔 한번에 그쳤다. 지난해 말 국회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국민들은 정 회장의 상태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의원들의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동문서답하기 일쑤였다. 정 회장은 1938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여든이다. 현대차 쪽은 ‘또래 노인들과 비슷하다’고 에둘러 말한다. 말귀가 어둡고,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을 잊어버리고, 인지력이 떨어지고…. 현대차 한 관계자는 “과거 업무처리 수준을 100%라고 한다면 지금은 30% 정도”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2000년 이전에는 글로벌 시장 변방에서 ‘값싼 차’를 만들던 ‘2류 업체’였다. 이후 10여년 만에 세계 시장의 8~9%를 차지하는 ‘글로벌 톱5’에 올랐다. 세계에서도 전무후무한 현대차의 성공신화는 사실 정 회장의 리더십을 빼고는 딱히 설명할 수 없다. 10개국 31개 공장에 80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갖추고, 세계 곳곳의 공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품질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정 회장은 2012년 내실경영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생산규모가 800만대를 넘어서면 추가 확대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중국 충칭과 창저우, 멕시코에 공장을 새로 지으면서 생산능력이 900만대를 넘었다. 반면 높은 증가세를 구가하던 판매량, 매출, 이익 등 경영지표가 제자리걸음 내지 감소세로 돌아섰다.

현대차의 위기 징후와 정 회장의 노쇠화 시점이 맞물리는 게 단순한 우연일까? 최고 의사결정권자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기업에 치명적이다. 더구나 현대차는 재도약이냐, 아니면 2류 업체로 다시 추락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더 큰 문제는 사안이 심각한데도 모두 쉬쉬한다는 점이다. 총수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다 보니 눈밖에 나면 바로 ‘잘리는’ 재벌 현실 때문이다.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이나 가까운 친척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범현대가의 한 회장은 “추석 때 집안이 모였다. 모두들 엠케이(MK·정몽구 회장) 문제를 걱정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총수가 죽어야만 승계가 이뤄지는 관행은 단지 현대차만의 일이 아니다. 이미 여러 재벌이 폐해를 경험했다. 롯데는 아흔살이 넘은 신격호 총괄회장을 마냥 방치하다가 아들 간 경영권 분쟁을 초래했다. 정 회장 자신도 2000년 현대그룹 경영권을 놓고 동생과 ‘왕자의 난’을 벌였다. 당시 부친인 고 정주영 회장은 오전의 결정을 오후에 뒤집을 정도로 오락가락하는 상태였다. 삼성도 이건희 회장이 2010년 경영 복귀 뒤 후계 문제를 조기에 마무리했다면, 아들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뇌물을 준 혐의로 감옥에 가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엘지는 총수의 건강이 그룹 경영에 위험요인이 되지 않도록 구자경 명예회장의 경우 일흔살에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사례를 남겼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실행위원은 “총수가 죽어야 승계가 이뤄지는 후진적 관행은 역량 검증이 안 된 3세의 승계와 함께 한국 재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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