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삼성 노조파괴 재고소고발 및 무노조경영 폐기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삼성에 항의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최근 친분이 있는 삼성 임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뜸 “문재인 정부는 정말 삼성을 죽이려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당혹스러웠다. 오비이락일까? 얼마 뒤 보수언론들은 문재인 정부가 ‘삼성 때리기’, ‘삼성 죽이기’를 한다고 성토하는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외견상 최근 진행되고 있는 삼성 관련 수사·조사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다. 최근 최대 현안은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조사와 삼성 노조파괴 문건 수사·조사다. 그 외에도 박근혜·최순실에 대한 뇌물 사건, 이명박 전 대통령 관련 다스 소송비 대납 사건, 이건희 회장 차명계좌와 비자금 의혹 수사, 국토교통부의 에버랜드 공시지가 산정 의혹 조사 등 큰 사안만 꼽아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삼성 때리기’ 주장의 이면에는 이런 수사·조사가 모두 부당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불법 혐의가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조작하거나, 사소한 문제인데 마치 대단한 사안인 것처럼 부풀리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삼성 사건의 일부는 이미 법원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박근혜·최순실 뇌물 사건이 대표적이다. 2심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고 해서 뇌물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또 노조파괴 문건 사건은 6천건이 넘는 방대한 증거자료가 확보됐다.
또 상당수 삼성 사건은 새 이슈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됐던 ‘묵은 사안들’이다. 삼성은 지난 80년간 무노조경영을 고수하며 숱한 부당노동행위 혐의를 받았다. 불법 정치자금이나 떡값 제공 혐의가 제기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삼성이 지금까지 적폐를 해결하지 않고 버텨온 것은 과거 정권의 ‘봐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2005년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에서는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과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이 불법 뇌물 제공을 공모하는 내용이 드러났다. 하지만 검찰은 모두 무혐의 처리했다.
‘삼성 봐주기’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게 삼성의 로비다. 삼성 컨트롤타워의 2인자로 불렸던 장충기 전 사장이 청와대·정부·검찰·법원·언론과 주고받은 수많은 메시지들이 드러났다. 이른바 ‘장충기 문자’는 대한민국에서 삼성 로비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삼성이 막강한 자금력, 인맥, 정보력을 이용해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한다는 ‘삼성공화국’ 의혹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촛불혁명 이후 한국은 급변했다. 새 정부는 적폐청산을 최대 국정과제로 추진 중이다. 국민도 ‘재벌 특혜’를 더는 용인하지 않는다. 현재 삼성 관련 수많은 수사·조사가 진행 중인 것은 문재인 정부가 ‘삼성 때리기’를 하기 때문이 아니다. 과거 정부와 달리 ‘삼성 봐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은 아직 이런 사회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삼성전자는 삼성전자서비스의 협력업체 소속 서비스기사를 직접 고용하고 합법적 노조활동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 관심은 80년간 지속된 삼성 무노조경영의 폐기 여부에 쏠렸다. 삼성전자에 입장을 물었다. 삼성전자 홍보실은 “삼성 계열사에 이미 여러 (민주)노조가 있지 않으냐”며 무노조경영을 아예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검찰 수사와 사회적 비난을 일시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꼼수를 썼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삼성의 전 고위 임원은 “삼성의 위기는 과거의 성공한 로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삼성은 수십년간 막강한 로비력을 이용해 문제가 발생해도 무마·은폐해왔다. 사법처리 대상이 되어도 검찰은 불기소, 법원은 집행유예, 대통령은 사면복권으로 봐줬다. 굳이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를 시도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삼성 내부 깊숙이 암세포가 퍼져갔다. 그동안은 정권의 봐주기라는 두꺼운 갑옷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갑옷이 벗겨지자, 썩은 고름이 사방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곽정수 경제에디터석 산업팀 선임기자
jskw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