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준법감시위원회를 새로 구성하고 위원장에 진보 성향의 김지형 전 대법관(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을 내정했다. 삼성이 위원장으로 법조계에서 ‘진보의 상징’인 김 전 대법관을 선택한 것은 파격적인 선택으로 비친다. 그러나 삼성이 ‘쇄신’의 모양새만 갖춘 뒤 진행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에서 형량을 낮추려는 전략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2일 삼성 고위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준법감시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위원장에 김지형 전 대법관을 내정했다. (김 전 대법관은) 현재 업무 준비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위원회는 이사회 산하 기구가 아닌 독립기구로 운영된다”며 “세부 운영방안은 김 위원장이 직접 확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전 대법관은 이날 오후 기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오는 9일 기자 간담회를 연다고 밝혔다. 위원회 구성과 운영방안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외부 인사 6명, 내부 인사 1명으로 구성될 이 위원회는, 그룹 전반의 준법 시스템을 들여다볼 계획이다.
준법감시위원회의 구성은 이재용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재판을 심리하는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 재판부의 주문에 따른 것이다. 정준영 부장판사는 첫 재판이 열린 지난해 10월 △과감한 혁신 △횡령 및 뇌물 범죄를 차단할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 △재벌체제 폐해 시정 등 3가지를 주문했다. 지난달 3번째 공판에서는 “권력자로부터 뇌물 요구를 받더라도 응하지 않을 방법을 다음 공판(1월17일)까지 제시해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제 구실을 할지에 대해선 의문이 나온다. 당장 이 위원회는 상법상 법적 기구가 아닌 터라 권한과 책임부터 명확하지 않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는 “재벌그룹은 권한이 총수에 집중돼 있고 외부 인사들은 정보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위원회가 효과적으로 제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며 “이번 재판에서 (이재용 부회장에게) 죄에 맞는 형이 선고되는 게 더 중요한데 이를 피해가는 구실로 새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쓰일 수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재판부의 요청 자체가 공정성 시비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적극적으로 화해하고 중재하는 사법 적극주의에 따른 요구로 보이지만, 사법의 본질은 행정이나 입법과 달리 판단하고 선언하는 것”이라며 “대기업과 정치 권력의 정경유착 범죄를 법원이 어떻게 판단할지, 그 판단이 사회에 던질 메시지는 무엇인지 고려해야 한다”고 짚었다.
김 전 대법관은 현직 재판관 당시 사회적 약자 편에 선 판결을 많이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1년 퇴임 후에는 공익적 성격의 대외 활동에 적극적이다. 2016년에는 ‘구의역 사고’ 진상규명위원장을, 2018년에는 김용균씨 사망 사고 관련 진상규명위원장을 맡았다. 2018년엔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와 관련해 가족대책위원회 추천으로 조정위원장을 맡아 피해보상 합의를 이끌어낸 바 있다. 지난해에도 잇따른 산재 사고로 질타를 받은 현대제철이 그에 대한 대응으로 꾸린 안전·환경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2009년 대법관 시절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발행을 통한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에 대해 무죄 의견을 낸 바 있다.
한편 삼성은 애초 김 전 대법관이 아닌 다른 진보 성향의 법조인을 영입하려 했으나 당사자가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채경화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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