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페루당의 카스티요가 19일(현지시각)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뒤 당사 발코니에서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리마/로이터 연합뉴스
페루 대선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후보인 페드로 카스티요(51) 후보가 당선됐다.
자유페루당 후보인 카스티요는 대선 투표 개표 결과, 50.12%를 득표해 우파 후보인 게이코 후지모리(49.87%)를 4만4천표 차로 따돌렸다고 <에이피>(AP) 등 외신들이 19일 페루 선관위원회의 발표를 인용해 보도했다.
카스티요는 이날 당선이 확정되자 수도 리마에 있는 당사 발코니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선거당국과 이번 민주적인 축제에 참여한 정당들에 모두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 나라를 정의롭고 자주적인 나라로 만들려는 노력에 함께 참여해 달라”며 단결을 호소했다.
당선 결과 발표는 지난달 6일 대선 결선투표가 치러진 지 대략 한달 반 만이다. 세번째 대선에 도전한 후지모리 후보가 개표 부정을 제기하고 나서면서, 선관위는 그동안 ‘재검표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최종 선거결과 발표를 미뤄왔다.
후지모리는 이날 선관위의 발표 직전 기자회견을 열어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겠다. 그것이 내가 수호하겠다고 맹세한 법과 헌법이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페루 역사에서 빈농 출신의 대통령 당선은 처음이다.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학의 페루 역사학자 세실리아 멘데스는 “페루에서 전문직 인사이거나 군부 인사, 경제계 엘리트 말고는 대통령이 된 전례가 없다”고 말했다.
카스티요는 이번 승리로 무명의 정치 신인에서 일약 페루 대통령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그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2017년 교사들의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벌인 총파업을 주도했지만, 중앙 정치무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사였다.
그러나 지난 4월 모두 18명의 후보가 나선 대선 1차 투표에서 예상을 뒤엎고 19% 득표로 1위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2차 결선 투표를 앞두곤 우파 세력이 좌파 후보의 갑작스러운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후지모리 후보 쪽으로 대거 집결하며 초박빙의 승부로 바뀌었지만, 끝내 막판 추격을 뿌리쳤다.
정치 신인 카스티요의 승리 배경에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 그리고 이에 대해 아무 대책도 못 내놓은 페루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 등 암울한 현실이 놓여 있다. 페루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사망자가 19만명에 이를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고, 지난해 경제도 -11% 성장으로 최악을 기록했다. 사회복지 시스템이 미비한 페루에서 시련은 특히 저소득층, 빈곤층에 가혹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은 최근 몇년 사이에 대통령이 무려 다섯번이나 바뀌는 혼란을 겪으며 국정 지도력은커녕 무능과 부패만 드러냈다. 이들 대통령은 모두 부패 혐의로 조사받았거나 수감됐고 한명은 경찰 수사망이 조여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민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불신은 극에 달했고, 이는 기존 정치권과 거리가 먼 무명의 정치 신인 카스티요를 일약 대통령으로 밀어 올린 밑바탕이 됐다. 카스티요 지지자인 환경운동가 마루하 잉키야는 “카스티요는 약속도 안 지키고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지도 않는 다른 정치인들과 다를 것이라고 믿는다”고 카스티요에 대한 신뢰를 나타냈다.
페루 대선에서 카스티요 후보의 당선이 19일(현지시각) 확정되자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리마/AFP 연합뉴스
페루의 국정을 이끌게 된 카스티요 당선자의 앞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우선 대선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 분열을 극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번 대선에선 어느 때보다 페루 국민 간 양극화와 갈등, 대립을 겪었다. 카스티요는 안데스 산간의 시골 빈농, 광산 노동자 등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도시의 경제 엘리트와 부유층, 전문직 등에선 좌파 후보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나타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요사는 대선 1차 투표 뒤 카스티요를 가리켜 “페루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실종을 대표한다”고 비난한 뒤 한때 정적이었던 후지모리의 지지를 호소했고, 전역한 군 출신 인사 몇몇은 2차 결선투표에서 카스티요의 승리가 유력해지자 공개적으로 ‘군의 궐기’를 촉구해 물의를 빚었다.
카스티요는 세계 2위의 생산량을 자랑하는 구리광산을 운영하는 다국적기업에 대해 광산 허가료와 세금을 인상해, 이를 의료와 교육 등 복지재정 확충에 사용할 뜻을 밝혀왔다. 그러나 다국적기업과 이를 뒷받침하는 국제 자본의 조직적 반발을 어떻게 제어할지는 만만찮은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버드대학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카스티요를 “매우 약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카스티요가 어떤 의미에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나 브라질의 주앙 굴라르 대통령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1970년대 집권한 사회주의자로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으며, 굴라르 대통령도 1960년대 군부 쿠데타로 쫓겨났다. 레비츠키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 있는 거의 모든 기득권 세력이 카스티요에게 적대적”이라고 덧붙였다. 박병수 선임기자
suh@hani.co.kr
▶관련기사
‘단숨에 1위’ 안데스 빈농의 아들, 불평등 그늘 지울까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982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