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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20년 전과 오늘, 다를 게 없다”…침통함 가득한 그라운드 제로

등록 2021-09-12 13:33수정 2021-09-12 22:04

현장 9·11테러 20년 추모행사
유가족 “20년간 한 해도 쉽지 않았어”
생존자 “5~6년간 거울 앞에 서서 울어”
아프간전 참전자 “여기서 내 힘든 여정 시작”
바이든, 공식연설 않고 영상으로 “단합” 강조
9·11 테러가 일어난 뉴욕 맨해튼 ‘그라운드 제로’ 근처의 트리니티 교회 울타리에 11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리본이 묶여있다.
9·11 테러가 일어난 뉴욕 맨해튼 ‘그라운드 제로’ 근처의 트리니티 교회 울타리에 11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리본이 묶여있다.
“오늘처럼 아주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어느 해도 더 나아지거나 쉬워지지 않았다.”

11일(현지시각) 뉴욕 맨해튼 세계무역센터(WTC) 빌딩이 서 있던 ‘그라운드 제로’의 기념식장에서 만난 60대 크리스 델로시는 고통을 억누르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날 뉴욕 인근 저지시티에서 항만관리청 경찰의 캡틴으로 일하던 아내 캐시 메자(당시 46살)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가운데 첫번째로 공격받은 노스타워에 투입됐다가 숨졌다. 델로시는 “사람들이 내 아내 뿐 아니라 희생된 모두를 항상 기억하고 잊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1일 뉴욕 맨해튼의 옛 세계무역센터 자리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9·11 테러 20주년 기념식에 유가족들이 입장하고 있다.
11일 뉴욕 맨해튼의 옛 세계무역센터 자리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9·11 테러 20주년 기념식에 유가족들이 입장하고 있다.
미국인의 삶은 물론 전 세계의 현대사를 바꿔놓은 9·11테러가 벌어진 지 이날로 20년을 맞았다. 올해 추모일은 20주년이라는 특별한 숫자에 더해, 8월 중순 탈레반의 정권 재장악과 그달 말 끝난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등 숨 가쁜 사건들이 이어진 탓에 더 큰 주목을 받았다. 미군 13명 등 100여명의 추가적인 희생자를 내며 이뤄진 ‘혼돈의 아프간 철수’로 인한 잔상 때문인지 미국인들의 감정은 더 침울하고 복잡해 보였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이뤄진 기념행사는 알카에다가 납치한 아메리칸항공 11편이 세계무역센터 노스타워에 충돌한 시각인 오전 8시46분 종소리를 신호로 한 묵념으로 시작됐다. 주변 세 블록을 차단한 채 희생자 가족들과 조 바이든 대통령,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하늘색 리본을 가슴에 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올렸다.

이어, 유가족 대표들이 약 네 시간에 걸쳐 테러 희생자 2983명의 이름을 돌아가며 호명했다. 이날 묵념은 유나이티드항공 175편이 세계무역센터 사우스타워에 충돌한 오전 9시3분, 아메리칸항공 77편이 워싱턴 펜타곤(국방부)을 때린 9시37분, 쌍둥이 빌딩이 붕괴한 오전 9시59분과 10시28분, 유나이티드항공 93편이 승객들과 테러범의 사투 끝에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에 추락한 오전 10시3분 등 6차례 이뤄졌다. 숨진 소방관 크리스토퍼 모질로(당시 27살)의 어린 조카는 연단에 올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여전히 많이 보고 싶어요. 엄마가 항상 삼촌이 했던 재미있는 별난 짓에 대해 얘기해줬어요. 내 최고의 수호천사가 돼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행사장 밖에서도 수백명의 시민들이 경찰이 세운 울타리 주변에서 그라운드 제로 쪽을 바라보며 추모에 동참했다. 경찰 통제가 이뤄지기 전인 전날에도 그라운드 제로의 ‘메모리얼 풀’(Memorial Pool)에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 쌍둥이 빌딩이 있던 두 자리에 각각 넓이 약 4000㎡, 깊이 9m로 만들어진 거대 인공 폭포다. 둘레 동판에는 9·11 테러와 1993년 2월의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희생된 298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노스타워에 입주했던 거래중개업체 아이캡(ICAP)에서 일한 벤자민 리베라(80)는 이날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현장에서 만난 기자에게 “26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다가 폭발음을 듣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인근 커피숍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고서야 상황을 알았다”고 회상했다. 아내, 손자와 함께 메모리얼 풀을 방문한 그는 “사고 뒤 5~6년 동안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일요일 아침 넥타이를 매고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이유 없이 울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희망을 향한 디딤돌로 삼으려 노력하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노스타워에 근무하다가 대피한 벤자민 리베라(오른쪽 둘째)가 10일 가족과 함께 메모리얼 풀에서 촬영에 응했다. 왼쪽 둘째는 당시 경찰관으로 일한 빅토리아 스코토 웡.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노스타워에 근무하다가 대피한 벤자민 리베라(오른쪽 둘째)가 10일 가족과 함께 메모리얼 풀에서 촬영에 응했다. 왼쪽 둘째는 당시 경찰관으로 일한 빅토리아 스코토 웡.
살아남은 이들의 간절한 바람은 “잊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테러 당시 경찰관으로 휴일도 없이 4개월 동안 구조작업에 참여했던 빅토리아 스코토 웡(53)은 “시간이 갈수록 여기서 일어난 일의 심각성과 영향에 대해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끔찍한 잔햇더미를 파헤치던 당시의 기억을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맨해튼 곳곳에 나부끼는 깃발에도 ‘9·11을 잊지 말라’고 쓰여 있다.

미국인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아프간 철수 결정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응급구조사 찰리 마텔(45)은 2002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2년 반가량 아프간에 투입됐다. 뉴욕 소방국에서 교육을 받다가 테러 일주일 전 노스캐롤라이나로 옮겼다는 그는 “이게 내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고통스러워서 이곳에 안 오다가 20년 만에 처음 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프간에 갔다 오길 되풀이하는 게 힘들었는데 이제 아프간 철군으로 무언가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철수는 옳은 결정이었지만 실행 과정이 엉망이었다”고 비판했다. 델로시는 “테러가 일어난 20년 전과 오늘 상황이 똑같아졌다”고 말했고, 웡은 “정부를 신뢰해야 옳지만 요즘은 그게 힘들다고 느낀다. 20년 동안 무엇을 한 거냐”고 되물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3차례 파견됐던 찰리 마텔이 10일 9·11 테러가 일어난 자리에 만든 ‘메모리얼 풀’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3차례 파견됐던 찰리 마텔이 10일 9·11 테러가 일어난 자리에 만든 ‘메모리얼 풀’을 내려다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뉴욕 그라운드 제로,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 워싱턴 펜타곤 등 9·11 테러 기념지 세 곳을 모두 방문하면서도 공식 연설을 하지 않았다.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오바마 등 전직 대통령들과 함께 참가자들 속에 섞여 선 채로 묵념 시간에 눈물을 훔쳤다. 대신 전날 6분가량의 영상메시지를 내어 “단합은 우리를 우리이게 하고 미국을 최상의 위치에 있게 한다”고 말했다. 섕크스빌에선 기자들에게 “70%의 미국인이 아프간에서 철수할 때라고 생각하지만 실행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며 “하지만 (혼돈 없이) 달리 어떻게 철수할 수 있을지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전보다 소심하고 우울하게 변했고, 이 변화가 불러올 또 다른 여파 앞에서 전 세계는 불안한 한숨을 내쉬고 있다.

지난 11일 9·11 테러가 일어났던 자리에 만들어진 ‘메모리얼 풀’에서 시민들이 추모하고 있다.
지난 11일 9·11 테러가 일어났던 자리에 만들어진 ‘메모리얼 풀’에서 시민들이 추모하고 있다.
뉴욕/글·사진 황준범 특파원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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