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를 방문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가운데)이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EPA 연합뉴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중동 지역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지도자를 잇따라 만나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에 대한 비난을 이끌어내고 미국 및 이스라엘의 입장을 이해시키려고 했으나 싸늘한 반응을 만났다.
블링컨 장관은 15일 이집트에서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과 만난 직후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고 말했다고 이집트 주재 미국대사관이 밝혔다. 블링컨 장관은 또 가자지구에서 이집트로 이어지는 통로로 봉쇄 책임을 놓고 말이 엇갈리는 라파 검문소를 다시 열기로 이집트 등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집트는 이곳을 통해 구호 물품을 들여보내도록 이스라엘이 협조하도록 요구해왔고, 미국은 500~600명에 이르는 가자지구 거주 미국인들을 빼내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엘시시 대통령은 블링컨 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움직임은 “자위권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집단적 처벌”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과 지상군 진격 계획을 비난한 것이다. 엘시시 대통령은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공격을 비난하면서도, 이스라엘 또한 팔레스타인과 별개 국가로 공존한다는 ‘2국가 해법’을 외면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궁지로 몰아갔다고 지적했다.
엘시시 대통령은 블링컨 장관이 최근 이스라엘을 방문해 한 연설에서 자신도 유대인이라며 하마스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 것에 대해서도 “당신은 유대인이라고 했는데, 난 이집트의 유대인들을 이웃으로 두고 자란 이집트인”이라며 말을 꺼냈다. 그는 “이집트 유대인들은 어떤 형태의 억압을 받거나 표적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서로 잘해야 한다는, 일종의 훈계로 들릴 만한 말이었다.
블링컨 장관과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만남도 매끄럽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는 블링컨 장관은 애초 빈살만 왕세자를 14일 밤에 만나려고 했으나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으며, 결국 15일 아침에야 만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블링컨 장관은 이 만남도 “매우 생산적이었다”고 했으나 미국 입장에서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빈살만 왕세자는 이 만남에서 군사 작전을 중단하고 가자지구 봉쇄를 풀어 상황을 안정시켜야 한다며 팔레스타인 쪽을 옹호했다고 사우디 언론이 전했다. 그는 하마스를 비난하지 않은 채 국제법 준수와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 등을 강조했다고 한다. 사우디는 이번 사태 발생 뒤 이스라엘과의 수교 협상 추진도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설득 노력에 대한 이집트와 사우디의 차가운 반응은 이들이 이슬람 세계의 지도적 국가들로서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집트와 사우디 정부는 그동안 충돌을 일으켜온 하마스를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가자지구의 대규모 인명 살상 우려는 이슬람권 민심을 자극해, 두 나라 정부도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이런 분위기는 하마스 응징을 강조하는 미국과, 미국의 동맹을 비롯한 이슬람권 국가들의 틈을 벌어지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미국 행정부의 강경한 태도는 허핑턴포스트가 입수해 공개한 미국 국무부의 지침으로도 확인된다. 이를 보면, 국무부는 직원들에게 이번 사태와 관련해 ‘긴장 완화/휴전’, ‘폭력 종식/유혈 사태’, ‘안정 회복’이라는 표현의 사용을 자제하라고 요구했다. 하마스와 타협을 추구하거나 유연하게 보이지 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편 지난 12일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등을 만난 블링컨 장관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의 협의가 또 필요하다는 이유로 16일 이스라엘을 다시 방문한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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