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들어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2010년 이후 6년 만에, 두 강대국(G2)의 패권 경쟁이 동아시아에서 다시 격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미 정부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반도 배치 발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의 남중국해 판결,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일본 여당의 평화헌법 개헌 가능 의석 확보 등 미-중 및 동아시아 역내 갈등을 고조시키는 발화점들이 잇따라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중국해는 동아시아에서 미-중 간 패권 경쟁이 가장 격렬하게 부딪히는 곳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상설중재재판소의 남중국해 판결은 미-중 간 힘겨루기의 한 획을 긋는 분기점이다. 중국엔 새로운 도전을, 미국엔 승리를 안겨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은 중국이 티베트나 신장처럼 ‘핵심이익’으로 간주하는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국제적 여론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 수용하지 않으면 이행의 구속력은 없지만, 중국에 대한 평판을 악화시킨다. 중국이 남중국해 인공섬을 건설하며 ‘영유권 굳히기’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 분쟁 당사국인 필리핀·베트남을 포함한 이들 국가를 측면지원하고 있는 미국이 나서 판결 수용을 중국에 압박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추진해온 남중국해 전략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은 남중국해를 놓고 중국과 영유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필리핀, 베트남 등에 대한 ‘사실상의 지지’를 통해 중국의 영토 확장 ‘야망’을 부각하고, 중국에 대한 국제적 평판을 악화시키며, 이를 통해 동아시아 개입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국제법적 정당성이 모호한데도 중국이 ‘완력’을 행사하며 남중국해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데는 두어 가지 이유가 있다. 국내적으로는 중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중국 인구가 소비하는 수산물 단백질 소비량이 급증하고 있다. 내해 및 근해를 벗어나 남중국해까지 원거리 조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중국해가 중국의 전략적·지정학적 요충이라는 점이다. 중국 남쪽과 필리핀 및 인도차이나반도, 보르네오섬으로 둘러싸여 있는 남중국해는 믈라카해협을 통해 인도양으로, 대만해협을 통해 동중국해로 연결된다. 태평양·인도양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기 위해선 남중국해에서 확실한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중국은 전체 석유 수입량 중 약 80%를 남중국해를 거쳐 수송하고 있다. 이른바 ‘에너지 안보’다. 남중국해가 막히면 중국의 경제적·군사적 활동은 ‘봉쇄’된다.
그런데 남중국해 제해권은 미국이 지니고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미국도 남중국해를 양보할 수 없다. 미국이 2011년 11월 선언한 ‘아시아재균형’ 정책은, 군사적 측면에서의 뼈대가 동아시아 축에선 남중국해 제해권 방어, 동북아시아에선 한·미·일 삼각 군사협력을 통한 중국의 태평양 진출 견제였다.
미국은 세계 물동량의 4분의 1이 남중국해를 오가는 상황에서 교역의 자유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함으로써 동맹국들의 신뢰를 얻어왔다. 게다가 소련의 붕괴 이후엔 남중국해에서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항행의 자유’를 통해 잠수함 활동과 정찰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왔다. 중국이 인공섬 건설 등으로 남중국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을 미국이 좌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동북아시아 축에선 사드의 한국 배치가 미-중 갈등의 전면으로 부각됐다. 미국은 사드 배치를 통해 중국이 발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궤적을 초기에 추적하고, 중국의 2격 능력(대응 공격능력)을 약화하려 한다. 중국의 격렬한 반발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이를 강행했다.
미국은 한·미·일 동맹 강화를 통해 중국의 태평양 영향력 확대 견제를 꾀하고 있다. 핵심 고리는 미-일 동맹의 강화, 즉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였다. 미·일은 2015년 4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에서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도록 미-일 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 개정 작업을 마무리했다. 한국은 미-일 동맹의 하위 동맹으로 편입돼 ‘2중대 역할’을 하도록 자리매김됐다.
미-중 양국 간 전략적 불신은 쉽게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미국은 중국이 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무너뜨리고 ‘왕 노릇’을 하려 한다고 의심하고, 중국은 미국이 자신들의 ‘굴기’를 억제하기 위해 아예 ‘싹’을 자르려 한다고 생각한다. 양국 간 군사적 협력은 초보적 수준으로, 불신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다.
전략적 불신은 2011년 1월 미-중 정상회담으로 봉합하는 듯 보였지만, 조금씩 다시 앙금이 쌓이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 중국의 인공섬 건설과 활주로 건설 등에 대해 미국 군부를 중심으로 불만이 높아갔다. 언제든 군사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고, 미국의 제해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미국도 최근 들어 눈에 띄게 공세적으로 대응해왔다. 필리핀 미군기지의 재사용을 확보하고, 올 5월엔 베트남 방문을 통해 첨단무기 수출금지 조처를 해제했다. 지난달 초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백악관으로 불러들였다. 6년 전에는 부상하는 중국의 공세적 대응에 미국이 힘겹게 패권을 수성하는 입장이었다면, 이번엔 미국이 회복된 경제력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중국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모양새를 띠며 공수가 바뀌었다.
수세에 몰린 중국이 남중국해와 동북아 지역에서 맞대응의 고삐를 늦추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3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식에서 첫 연설을 통해 ‘중국의 꿈’을 강조했다. ‘국가부강, 민족진흥, 인민행복’을 실현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자는 중국의 꿈을 포기할 리 없다. 중국 관영 <인민일보>도 지난 10일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과 관련해 “휴지 조각이 될 운명”이라고 못박으며, 어떤 판결이 나오건 내용을 이행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미리 확인했다.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과정에서 미국 등 서방 주도의 질서를 바꾸는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적도 있다.
미-중 간 동아시아 패권 경쟁과 맞물려 중-일 간 역내 라이벌 경쟁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위험성을 더 높일 수 있다. 일본은 중국이 지난 70년 동안 미·일이 동아시아에서 정해둔 기존 질서와 규범들을 준수하는 책임 있는 국가로 성장할지에 대해 신뢰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아베 정권은 참의원 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집단적 자위권을 무한정으로 행사하기 위한 헌법 개정도 염두에 두고 개헌 작업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아베 총리는 11일 기자회견에서 2012년 4월 자민당이 만든 “헌법 개정 초안을 베이스(기초)”로 개헌 논의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이는 다시 중국의 위협 인식을 높여, 군비 증강을 서두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최소한 단기적으로 동아시아 패권 경쟁이 진정되기보다는 확대재생산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일본 양쪽에서 들어오는 대중국 압박은 중국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이는 다시 중국 지도부에 강경한 대응을 주문하는 여론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은 올해 말 대선을 앞두고 있고, 대중국 정책이 불확실성 앞에 놓여 있다. 이번 대선에서 전반적인 고립주의 강화 경향에 비춰볼 때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중국에 대한 강경 대응 목소리가 높아질 수 있다.
워싱턴 베이징 도쿄/이용인 김외현 길윤형 특파원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