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메릴 스트립이 레드 카펫을 지나가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FP 연합뉴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메릴 스트립을 비롯해 수많은 출연자들과 수상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비꼬았다. 미국의 영화배우, 가수들이 시상식 등공개무대에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건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로버트 드니로, 조지 클루니, 스칼렛 요한슨, 우피 골드버그, 줄리아 로버츠, 샤를리즈 테론, 엠마 스톤 등이 트럼프에 대한 공개반대 및 대중집회에 직접 참석해 트럼프 또는 그의 정책을 비판했다.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 및 연예, 미디어 업계 종사자들이 진보적 성향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업종 성격상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예술과 창작에서 자유주의적적 성향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종사자들의 80% 이상이 친민주당 성향이다.
할리우드 종사자들이 정치에 직접 개입하게 된 것은 1930년대부터이다. 그 이전까지 할리우드 종사자들은 사회적 행동에 나서기 보다는 열악한 노동조건을 놓고 영화산업 자본주와의 분규, 섹스스캔들로 뉴스에 올랐다.
1934년 사회주의 성향 작가인 업톤 싱클레어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출마하면서 할리우드의 정치지형은 급격히 진보로 쏠렸다. 시카고 도축공장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폭로한 <정글> 등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싱클레어는 ’캘리포니아 빈곤 종식운동’이라는 진보적 풀뿌리 운동으로 민주당 주지사 예비선거에서 압승했다.
할리우드 자본주들은 싱클레어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당선 저지에 나섰다. 톱스타들을 포함한 모든 종사자들의 하루치 급료를 강제로 공제해 엠지엠(MGM) 영화사에 마련된 공화당 후보의 선거모금에 내기도 했다. 엠지엠의 유명한 제작자인 어빙 솔버그는 유대인 출신임에도 유대인을 학살하는 나치보다는 공산주의가 더 나쁘다며, 반싱클레어 선거운동을 주도했다. 현재 정치광고의 원형도 이 때 개발됐다. 엠지엠은 싱클레어를 공격하는 정치광고를 이때 만들어 배포했다. 현재 문제가 되는 ’페이크뉴스’(가짜뉴스)로 구성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할리우드 자본주들은 진보적 성향의 작가와 배우들을 압박해, 오히려 이들로 하여금 조직적인 정치 행동으로 나서게 했다. 1933~1934년에 결성된 극작가조합과 배우조합에 유명 인사들이 가입해, 노동조건에서부터 자본주들의 정치적 협박에 맞서 싸웠다. 싱클레어는 주지사 선거에서 떨어졌으나, 1938년 선거에서는 싱클레어의 동맹자인 올슨 컬버트는 할리우드 종사자들의 도움에 힙입어 당선됐다.
할리우드의 여배우 헬렌 거해건 더글러스는 할리우드 스타들의 정계 진출 신호탄을 날렸다. 더글러스는 1944년 캘리포니아에서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민주당의 첫 여성 연방의원이자 미국에서 3번째 여성 연방의원이었다. 더글러스는 1950년 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자신을 ’빨갱이’로 낙인찍는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에게 패배했다. 당시 강경한 민주당원이던 영화배우 로널드 레이건도 더글러스 지지운동을 하다가 공화당으로 전향해,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대통령이 된다.
할리우드는 1940년대 후반부터 몰아친 미국의 반공몰이인 매카시즘의 광풍에 초토화됐다. 찰리 채플린은 ’빨갱이’로 몰려, 미국을 떠나야 했다. 닉슨이 사실상 주도한 의회의 반미활동조사위원회는 할리우드의 수많은 극작가 등 종사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현직에서 쫓아냈다. <워터 프론트> <에덴의 동쪽> 등 명작 영화를 만든 엘리아 카잔,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을 쓴 미국의 대표적 극작가 아서 밀러 등은 반미위원회에 불려나와 동료들을 고발하는 흑역사를 겪었다. 할리우드는 1960년대 반전운동을 거치며 다시 진보성향을 회복했다.
하지만, 할리우드 스타파워을 이용해 정치에서 성공한 인물들은 대부분 보수주의자들이다.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된 아널드 슈워제너거, 미국 보수주의의 최대 로비단체인 전미총기협회장을 지낸 찰턴 헤스톤이 대표적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동력의 절반 이상도 그가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덕택이다. 슈워제너거도 최근 트럼프를 반대하는 선봉에 서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