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 참사가 발생한 미국 플로리다 마저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의 생존 학생인 데이비드 호그가 지난 24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총기규제를 촉구하며 연설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정의길 국제에디터석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Egil@hani.co.kr
“그래서 (로라 잉그럼) 당신의 최대 광고주는 누구인가…친구에게 묻는다. #잉그럼 광고 보이콧.”
지난 24일 워싱턴 등 미국 전역에서 최대의 총기규제 촉구 집회를 이끈 한 주인공인 고교생 데이비드 호그는 29일 자신의 트위터에 <폭스 뉴스> 진행자 로라 잉그럼 프로그램의 광고주를 물으며 그 회사 광고의 거부 운동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곧 12개의 광고주를 밝혔다.
전날 잉그럼은 “데이비드 호그가 입학을 지원한 4개의 대학교에서 거절됐고, 그걸 놓고 징징거린다”는 트위트를 올렸다. 앞서 호그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대학을 가면 빚부터 져야 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자신의 학점이 4.2인데도 캘리포니아대학교 등에 대한 자신의 입학 지원이 거부된 사실을 밝혔다. 총기참사 사고가 일어난 플로리다 마저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의 학생인 호그는 그 후 적극적인 총기규제 운동을 주도하면서 우파 진영으로부터 각종 비난과 중상에 시달려왔다. 잉그럼의 트위트도 그 일환이었다.
호그가 이 트위트를 한 그날로 ‘뉴트리시’가 즉각 잉그럼의 프로그램에 대한 광고를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네슬레 등 3개 회사도 동참했다. 잉그럼도 그날로 백기를 들었다.
“성주간(Holly Week·예수 부활 전 일주일)의 정신으로 깊이 반성해, 내 트위트가 그와 파클랜드의 용감한 희생자에게 가한 상처와 위해에 사과한다.”
플로리다 총기난사 사건 이후 총기규제 운동으로 촉발된 미국 청소년운동의 위력이 커지고 있다. 유명 방송 앵커인 잉그럼이 청소년인 호그를 상대로 저열한 도발을 하다가 망신을 당한 것은 호그로 상징되는 청소년운동의 위력을 보여줬다. 플로리다 총기난사 이후 미국 여론을 움직이는 청소년운동을 광고주들도 호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총기난사를 당한 플로리다 마저리 스톤맨 더글러스의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촉발된 총기규제 운동은 지난 24일 수도 워싱턴에 80만명이 운집하는 등 미국 전역에서 ‘우리 생명을 위한 행진’을 조직해냈다. 이는 1960~70년대 반전운동 이후 최대 운동으로 번진 상황이다. 반전운동이 대학생 중심이었다면, 이번 운동은 고교생 등 청소년이 주도하고 있다. 청년운동의 주도층 나이가 더 어려진 것이다.
미국 현대사에서 청소년들이 중요한 사회운동에 불을 붙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60년대 미국 민권운동의 시발이 된 로자 파크스 사건 역시 그 원형은 한 청소년이 먼저 선보였다. 1955년 앨라배마 몽고메리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서 체포됨으로써, 민권운동의 시발이 됐다. 하지만 그보다 9개월 전에 몽고메리에서는 15살 흑인 소녀 클로뎃 콜빈이 버스의 백인 전용 좌석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해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당시 몽고메리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 지도부는 회원인 로자 파크스에게 콜빈의 저항 행태를 복사하도록 했고, 콜빈 대신 파크스 사건을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으로 삼았다. 나중에 콜빈은 “어른들은 10대들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운동의 상징이 10대가 아니라 어른이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운동 지도부들의 생각이었다.
미국에서 청소년들이 정치사회 문제에서 조직적인 목소리를 내고 앞서나가는 것은 최근 미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낳은 부산물이다. 미국의 사회적 진보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진영이 1980년대 이후 지리멸렬하고, 자유주의 성향의 어른들도 이런 상황에 냉소적인 태도로 돌아선 배경이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분석했다. 어른들의 빈자리를 청소년들이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청소년운동은 1999년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 이후에 태어난 청소년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들은 이 사건 이후 학교 내에서 학살을 목적으로 하는 의도적인 총기난사 사건을 수없이 보면서 성장했다. 이들은 총기 규제에 대한 논의는 무성하나 실효적인 대책은 전무한 상황을 지켜봤다. 또 이들에게 총기소유는 이전 세대에 비해 훨씬 혐오스러운 일이 됐다고 신문은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전후로 에스엔에스를 통한 개인들의 정치적 의견 표출 등은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더 쉽게 내도록 하는 배경이 됐다.
지난 24일 행진이 청소년운동에 의해 자극된 미국 진보진영의 단결과 행동을 상징한다면, 로라 잉그럼 사건은 광고주라는 자본도 청소년운동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총기규제 운동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투표할 나이가 되면 반드시 총기규제를 무력화하려는 정치인들을 응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미국의 청소년운동이 미국을 바꿀 수 있을까?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시작으로 그 효과가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