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해 1982년에 체포된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유치장에 갇혀 있는 모습. <시엔엔>(CNN) 누리집 갈무리
모스크에서 동생과 함께 새벽 기도를 마치고 귀가하던 소년 앞에 승용차 한 대가 멈춰섰다. 차 안에 있던 후세인 엘샤페이 당시 이집트 부통령은 소년을 태워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소년은 그를 알아봤다. “무슬림을 죽인 재판에 참여한 사람에게 차를 얻어 타고 싶지 않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엘샤페이는 이슬람주의자들을 처형한 재판관 출신이었다.
60여년이 흐른 지난달 31일 아침 6시께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부촌인 셰르푸르 지구의 한 주택 발코니에 나와 있던 남성이 상공에 떠 있던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드론에서 발사된 헬파이어 미사일에 저격됐다. ‘지하드’(성전)를 펼친다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잃게 한 아이만 알자와히리(71)의 파란만장한 삶의 마지막이었다.
2001년 9·11 테러는 ‘이집트의 잔혹한 감옥’과 ‘아라비아의 거친 사막’에서 배태됐다고, 이 사건을 다룬 역작 <루밍 타워>의 저자 로런스 라이트는 평했다. 이집트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급진화된 이슬람주의 지식인·학생운동 세력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이슬람주의인 와하비즘 세력의 결합이 알카에다라는 지하드 국제주의 운동으로 발전해 9·11 테러로 귀결됐다는 것이다. 알카에다의 전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이 아라비아의 거친 사막을 대표한다면, 알자와히리는 이집트의 잔혹한 감옥을 상징한다. 빈라덴이 알카에다의 얼굴과 자금을 맡았다면, 알자와히리는 이데올로기와 조직을 맡았다.
친가가 유명한 의사 가문이고, 외할아버지가 카이로대학교 총장과 파키스탄 주재 대사였던 명문가 출신인 알자와히리는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소년 시절에 ‘이슬람주의의 레닌’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론가 사이드 쿠틉이 이집트 군사정권에 의해 처형됐다. 쿠틉은 이슬람주의 운동에서 혁명적 전위와 무장투쟁을 지하드의 개념으로 재탄생시킨 이론가이다. 알자와히리의 외삼촌 마푸즈 아잠이 쿠틉의 제자이자 변호인으로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알자와히리가 외삼촌에게 전해들은 쿠틉의 얘기는 가슴에 평생 남아 그의 인생을 결정했다.
쿠틉이 처형당한 1966년에 알자와히리는 15살의 나이로 세속주의 정부 전복과 정교일치 이슬람 국가 건설이 목표인 지하조직 창설에 가담했다. 이런 학생운동 조직은 곧 이집트 지하드 조직으로 발전했다. 알자와히리는 명문 카이로의대에 진학했지만, 그의 여정은 지하드주의에 입각한 이슬람주의 무장운동의 궤적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자마트 알 지하드’라는 본격적인 지하드주의 지하조직을 결성했다. 1981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암살에 이 조직이 관여돼 그도 체포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고문을 받고 수사에 협조해 사형을 면하고 4년형을 선고받았다. 죄책감에 시달린 그는 출옥 뒤 소련의 침공을 받은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서 이슬람 게릴라인 무자헤딘 운동에 관여하며 지하드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거듭났다. 1980년대 말 그는 ‘지하드 그룹’이라고 불리는 ‘이집트이슬람지하드’(EIJ)의 지도자가 됐고, 아프간에서 빈라덴을 만났다.
알자와히리와 빈라덴의 결합은 지하드 운동에서 획기적인 노선 전환을 만들어냈다. 소련의 침공을 물리친 무자헤딘 투쟁 이후 이슬람주의 운동 내부에서는 알자와히리와 팔레스타인 출신 압둘라 아잠으로 대표되는 두 진영이 노선투쟁을 벌였다.
옛 주류였던 아잠은 이교도의 지배를 받는 팔레스타인 등의 무슬림 지역을 우선투쟁 대상으로 설정한 반면, 새롭게 주류로 떠오르던 알자와히리는 이집트 등 무슬림 국가 내의 지하드 혁명을 우선시했다. 알자와히리 쪽은 지하드 투쟁을 반대하는 무슬림들도 적으로 돌린 반면, 아잠은 무슬림 대 무슬림의 투쟁이나 여성과 어린이도 가리지 않는 테러에 반대했다.
이 노선투쟁에서 빈라덴이 알자와히리 쪽의 손을 들어줘 지하드 운동은 더욱 과격한 국제주의 노선으로 치달았다. 빈라덴은 무슬림 세계에서 이슬람 혁명의 전제는 미국과 서방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결합으로 무슬림 국가의 혁명을 위해서는 미국을 우선 공격하는 국제주의 테러 투쟁 노선이 확립됐다. 빈라덴의 명망과 자금, 알자와히리의 조직원과 이론이 합쳐진 알카에다가 1988년 9월 파키스탄의 아프간 접경 도시 페샤와르에서 결성됐다.
알카에다 결성은 곧 9·11 테러로 이어졌다. 9·11 테러와 이에 대응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알카에다 등 지하드주의 세력에게 큰 변화를 안겼다.
미국에 쫓긴 알카에다 지도부의 세력이 약화돼, 미국을 겨냥하는 글로벌 지하드 운동보다는 각 지역 차원의 지하드 세력들로 분화됐다. 이는 빈라덴이 2011년 미국에 의해 제거된 뒤 알자와히리가 알카에다 수장을 맡으면서 더욱 본격화됐다.
이라크의 알카에다 지부 세력이던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가 2014년 이슬람국가(IS)로 독립해 한때 이라크와 시리아의 영토를 장악한 준국가세력으로 성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슬람국가 출현은 지하드 진영 내에서 알카에다의 정통성과 알자와히리의 지도력에 결정적 타격을 줬고, 이슬람국가가 한때 지하드 진영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알자와히리는 이슬람국가의 수장인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로부터 ‘파키스탄 산악에 숨어 있는 노인’이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테러와의 전쟁’에서 쫓기는 알카에다의 와해를 막고 연착륙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무슬림 세계의 핵심인 아랍 지역에서 세력이 크게 위축됐으나, 다른 지역의 지부 세력들이 상대적으로 활성화됐다. 북아프리카, 소말리아, 예멘의 지부들이 건재하고, 남아시아·말리 등지에서 새로운 지부도 결성됐다. 알자와히리는 “알카에다의 단결을 유지하며 여전히 지하드 운동이 글로벌 전위라는 의식을 주입했다”고 미국의 대테러 전문가인 콜린 클라크는 <포린 폴리시>에서 평가했다.
알자와히리의 사망은 알카에다 및 다른 지하드 세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를 고리로 했던 알카에다와 아프간의 탈레반 세력과의 관계가 결국 단절될지 미국 국방부는 주시하고 있다. 국방부는 최근 보고서에서 “알카에다 지도자들은 고위 탈레반 지도자들과 오랜 관계이나, 아프간 내에서 알카에다의 활동은 국제사회의 합법성을 인정받으려는 탈레반의 노력으로 더욱 제한될 것”이라며 향후 12~24개월이 고비라고 평가했다.
카이로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던 1970년대 중반 젊은 자와히리(왼쪽)와 9·11 테러 이후 아프간에서 알카에다 지도자 시절의 장년 자와히리.
알카에다 지부의 상대적 활성화로 상징되는 지하드 운동의 지역화도 더욱 촉진할 것으로 보인다. 알카에다의 차기 지도자로 거론되는 인물들 역시 그런 추세를 반영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이집트군 대령 출신인 60대 초반의 사이프 알아델, 알자와히리의 사위인 모로코 출신 50대 초반의 압드 알라흐만 알마그레비가 거론된다. 두 인물은 현재 이란에서 반연금 상태다. 이들이 차기 지도자로 오른다면 알카에다의 분화는 더욱 재촉될 것으로 보인다.
가장 강력한 지부들인 북아프리카 ‘이슬람마그레브알카에다’(AQIM)의 수장 야지드 메브라크, 소말리아 ‘알샤밥’의 아흐메드 디리예도 후보이다. 하지만 이들이 알카에다 본부를 맡을 의향이 있는지 의문이고, 알카에다의 주류들인 이집트와 사우디 출신들에게도 거부감이 크다.
9·11 테러 발생 약 두달 뒤인 2001년 11월 초 알카에다 당시 수장 오사마 빈라덴(왼쪽)과 아이만 알자와히리(오른쪽)가 파키스탄 언론인 하미드 미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알자와히리의 사망으로 현대 지하드 투쟁의 1세대가 퇴장하고, 20년간 지속된 대테러전 역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게 됐다. 알자와히리 제거에서 보듯이 미국의 대테러전은 현지에 직접 군사력을 투입하는 전략에서 감시와 추적을 통해 원거리에서 선택적으로 타격하는 ‘오프쇼어(Offshore) 전략’으로 바뀌고 있다. ‘멀리 있는 적인 미국을 우선 공격해야 한다’는 빈라덴과 알자와히리의 노선보다는 각 지역 내에서 토착 지하드 운동을 우선시하는 세력들로 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