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아이를 철들게 한다. 아니, 강요한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의 상황에서,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된 소녀들은 원하지 않아도 엄마가 된다. ‘10대 맘’들이 기죽지 않고 맘놓고 공부할 순 없을까. 오랜 내전을 겪은 라이베리아 몬로비아의 페인즈빌 교육센터와 싱크홈 직업훈련센터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있는 10대 미혼모들을 만났다.
태어난 지 9개월 된 사내 아이 루퍼 코코는 배가 고팠나 보다. 목젖을 젖히며 앙앙 울어댄다. 엄마 루스 콜리가 얼른 품에 안았다. 루퍼는 15살 엄마의 젖을 꼴깍대며 빨아댔다. 지난해 11월11일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몬로비아에 있는 페인스빌 교육센터에서 만난 루스는 젖먹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꺼낼 때 바르르 떨렸던 입술이 활모양으로 곱게 휘었다.
페인스빌 교육센터는 6~18살 소녀 70여명이 공부하고 있는 대안교육기관이다. 정규학교에 갈 형편이 안 되는 아이, 입학 연령을 훌쩍 넘긴 아이, 그리고 아기가 있는 아이들이 온다. 또 그 아이의 아기도 함께. 라이베리아에선, 가난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몇가지 안된다. 집안 일을 하거나, 소소한 물건을 떼어와 노점을 하거나, 아니면 성매매를 하거나. 그래서 페인스빌 회관에 오는 아이들은 마음에 피멍이 맺힌 경우가 많다. 외롭고 괴롭고 자기가 싫고 세상이 밉고. 페인스빌 회관의 원장인 무수 카마라는 “이곳에서 주로 하는 일은 읽고 쓰기 같은 기초 교육을 비롯해 상담, 자기를 분명히 표현하는 방법, 임신·출산·피임 등 모성보건에 관한 강습, 제과제빵 같은 간단한 직업 교육”이라고 설명했다. 정규 교육은 아니지만 내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폭력과 범죄가 난무하는 라이베리아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어렵게 인터뷰에 응한 루스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엔 슬픔이 서려 있었다. 라이베리아 내전으로 아버지를 잃은 루스는 이모에게로 보내졌다. 이모가 도시에 살아서 학교 다니기 좋다는 이유였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이모 집에서 밥 얻어먹기조차 힘들었던 루스는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면 거리로 나갔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남자들이 멈췄다. 그렇게 몇번 만난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기가 생겼다. 하지만 아이 아빠는 자기 애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루퍼를 낳은 뒤 루스는 다른 이모 집으로 옮겼지만 눈치가 보인다. 루스는 오후 3시에 페인스빌 센터 수업이 끝나면 애를 들쳐 업고 비닐 봉지에 물을 담아 파는 장사를 한다. 밤늦게까지 일해도 손에 쥐는 돈은 하루에 50라이베리아달러(60센트). 그래도 루스는 “미래에 도움이 될 거 같아”페인스빌 센터에 오는 게 즐겁다고 했다.
라이베리아의 몬로비아에 있는 싱크홈 직업훈련센터에서 학생들이 재봉틀로 박음질 연습을 하고 있다.
루스의 친구인 세라 케셀리(18)는 17개월짜리 아들 조이스를 키운다. 세라는 학교 선생님의 꾐에 넘어가 임신하게 됐는데 교사들은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고 비난만 퍼부었다. 이모댁에서 먹고 자지만 아이 키우는 돈은 스스로 벌어야 한다. 세라는 페인스빌 센터에서 뜻이 통하는 친구 5명과 함께 ‘수수’라고 불리는 라이베리아의 전통적 협동조직, 즉 ‘계’를 꾸렸다. 매주 20라이베리아달러(25센트)를 모아 120라이베리아(1·5달러)씩 몰아준다. 페인스빌 회관에서 간단한 제과 기술을 익힌 세라는 곗돈을 받으면 밀가루를 사서 회관의 오븐을 이용해 쿠키를 구워 판다.
페인스빌 센터 과정을 마친 아이들 가운데 몇몇은 세이브더칠드런의 후원을 받는 싱크홈 직업훈련센터에서 9개월 과정의 미용, 제과·제빵, 재봉 등의 전문 기술을 배울 수 있다. 2003년 문을 연 싱크홈은 기숙사를 겸하고 있어 거처가 불안정한 소녀들에겐 더할 수 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페인스빌 센터에서 걸어서 20여분 거리인 싱크홈은 마치 수도원처럼 가시철망이 달린 시멘트 담에 육중한 철문으로 둘러싸여 있다. 라이베리아의 치안이 불안한 탓이다. 하지만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날아와 귀에 꽂혔다. 보라색 문양이 있는 가운을 걸친 소녀들이 나란히 서서 머리카락을 여러갈래로 촘촘히 땋는 ‘드레드락’을 연습하고 있었다. 연습용 인조 머리카락이 놓인 의자 한 귀퉁이에선 기저귀를 찬 아기가 재롱을 피웠다. 아이가 웃을 때마다 소녀들의 목소리도 한 옥타브씩 높아졌다. 9월부터 시작된 이번 학기에 참여한 이들은 25명, 이중 12명이 ‘10대 맘’(10대 미혼모)이고 이들의 아기 12명이 기숙사에서 함께 산다. 싱크홈은 ‘10대 맘’들을 비롯해 가난한 소녀들에게 자립 기반을 만들어주는 게 목표다.
내전의 상처 깊은 라이베리아
학교 못간 소녀들 페인즈빌 센터서
읽고 쓰기와 제과기술 등 배워
애 업고 비닐봉지물 파는 15살 루스
“미래에 도움될 것 같아 여기 와요”
졸업 뒤엔 싱크홈 직업훈련센터서
미용·재봉 기술 배우며 자립 준비
1989년부터 시작해 2003년에야 포연이 멈춘 라이베리아 내전이 남긴 상처는 컸다. 전쟁으로 가장을 잃은 가족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돈을 받고 나이 많은 남자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것이 다반사였고, 성매매로 살아가는 여성들도 많이 생겨났다. 여성인 엘런 존슨 설리프 대통령의 취임 이후 아동보호법 개정으로 아동 성매매 처벌이 강화됐지만 여전히 소녀들은 치안 부재, 폭력, 가난, 차별의 위협에 놓여 있다.
싱크홈에서 만난 18살 동갑의 두 소녀, 에밀리아 라이트와 하와 마리스는 페인스빌 센터를 다닌 뒤 싱크홈으로 와서 함께 미용 기술을 배우고 있다. 에밀리아에겐 두살, 5개월 된 두 아기가 있고, 하와에겐 세살배기 아이가 있다. 그러나 두 소녀는 아이들의 아빠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적극적이고 발랄한 성격의 에밀리아는 “나는 사람들을 딱 보면 어떤 머리가 어울릴지 바로 생각이 떠오른다”며 “스스로 생각해봐도 미용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에밀리아는 “내가 둘째까지 임신했을 때는 친구·이웃들이 모두 따돌렸지만 지금은 내 차림새가 좋아지고 자신감이 생기자 나를 함부로 못 대한다”며 웃었다. 갈쭉한 눈매가 웬지 쓸쓸해 보이는 하와는 이전엔 숯을 구워 파는 일을 했었다. 할머니와 함께 살며 숯검댕이에 묻혀 지냈던 하와는 페인스빌 센터에 와서야 겨우 읽고 쓰기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젠 “아이와 살아남기 위해” 싱크홈으로 왔다고 했다. 두 사람은 내년에 싱크홈을 졸업하면 일단 이곳에서 익힌 미용 기술로 생계를 꾸릴 예정이다. 하지만 꿈은 더 크다. 하와는 앞으로 정규학교에 진학해 의사나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라이베리아 학제상 하와가 의사 또는 간호사가 되려면 최소한 10년은 더 걸리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졸업하면 일단 고객을 확보하고 미용으로 돈을 벌겠다”는 에밀리아는 주저주저하다 장래 희망을 밝혔다. “기자들은 말도 잘하고 이해력도 빠른 것 같다. 내 꿈은 기자다.” 그에게 “나중에 세계기자협회에서 만나자”고 말한 뒤 악수를 나눴다.
몬로비아(라이베리아)/ 이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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