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방글라데시 치타공 외곽에 있는 한국수출가공공단(KEPZ) 내 영원무역 공장에서 최저임금 인상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파빈의 어머니가 딸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다. 류이근 기자
총, 특권, 거짓말 : 글로벌 패션의 속살
방글라데시를 가다
① 10달러의 대가
방글라데시를 가다
① 10달러의 대가
국내 인권 및 노동단체들이 이달 들어 영원무역을 비롯한 한국 기업들의 방글라데시 사업장에서 빚어진 노동권 침해 실태를 조사했다. 지난 1월 방글라데시에서 한 여성 노동자의 사망으로 이어진 현지 진출 기업들과 현지 정부의 노동 탄압 사건에서 비롯된 움직임이었다. <한겨레>는 한국 기업의 사업장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의 사망 사건 뒤 2명의 기자를 보내 약 한 달에 걸친 현지 취재 활동을 벌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패션 시장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방글라데시 현지의 참상을 전한다.
기본급을 올린 회사가 내민 건
수당을 줄여놓은 월급명세서
기계가 서고, 5천명이 모였다 경찰의 구타, 연이은 총성…
무리속에서 파빈이 쓰러졌다 예부터 벵골과 펀자브에서 나는 쌀로 인도를 먹여살린다는 말이 내려왔다. 벵골의 나라란 뜻인 이곳 방글라데시는 갠지스강 하류의 넘쳐나는 물과 사시사철 따뜻한 기후가 어우러져 삼모작이 가능한 풍요로운 땅이다. 하지만 누구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땅 한 뙈기 없던 파빈의 아버지는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었다. 릭샤(자전거를 개조한 인력거)를 몰기도 했지만, 두 해 전 세상을 떴다. 늙고 병든 엄마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즈음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외국 공장이 들어섰다. 사람을 뽑는다기에 여동생 나시마가 줄을 서 면접을 봤다. 나시마는 면접 사흘 만에 봉제일을 시작했다. 없는 돈을 쪼개 치타공 시내까지 나가 학원에서 미싱을 배운 게 도움이 됐다. 나시마는 다달이 6000타카(약 8만원)를 벌어 왔다. 방글라데시 영원무역 신발 공장
월급 10달러 인상을 요구하다
미싱보조 파빈이 총탄에 쓰러졌다 “무섭지만 밥 달라는 ‘나쁜 배’ 때문에”
그녀 동생은 아직 미싱을 돌린다 나시마 덕에 엄마와 네 남매가 세 끼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됐지만, 집안 형편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아픈 엄마는 병원은 고사하고 약국조차 갈 수 없었다. 3000타카(약 4만원) 넘는 빚은 쉬이 줄지 않았다. 집안 살림을 도맡던 파빈도 지난해 9월부터 돈을 벌러 나섰다. 동생 나시마의 추천으로 어렵지 않게 같은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이 나라에선 주로 친인척이나 친구의 추천을 받아 사람을 쓴다. 파빈은 올해 스물한 살이다. 이곳 여성들은 보통 이 나이면 결혼하지만, 파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딸은 엄마 곁을 지키려 했다. 파빈은 엄마에게 “시집 안 갈래. 엄마랑 같이 살 거야. 내가 돈을 벌게”라고 말하곤 했다. 파빈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한두 달 더 공장에 다니면 동생처럼 헬퍼(보조)에서 오퍼레이터(미싱사)로 올라갈 수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큰 외국계 기업인 영원무역 공장에 다니는 것도 자랑스러웠다. 지난 1월9일, 파빈은 여느 때처럼 새벽 5시30분께 눈을 떴다.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7시께 동생과 집을 나섰다. 자매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기다리던 월급날이다. 둘은 얼마 전 총리가 방송에 나와 “1월 월급분부터 최저임금이 인상된다”고 한 발표를 들었다. 각자 월급이 1000타카(1만3000원) 넘게 오를 것으로 잔뜩 기대했다. 파빈은 동생한테 “빚도 조금 갚고, 엄마를 의사한테 모시고 가자”고 말했다. 떨어지는 쌀도 급했다. 자매는 어느새 제복을 입고 긴 총을 멘 경비들이 지키고 서 있는 한국수출가공공단(KEPZ) 정문을 통과했다. ‘1000타카 인상되리라’ 설레던 월급날 21살 여공의 머리에 총알이 날아들었다 파빈은 7번, 나시마는 6번 공장으로 빨려들어갔다. 7번 공장에서 파빈은 퓨마(Puma) 브랜드 운동화를 만들었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의 제조업체로 유명한 한국 기업 영원무역은 노스페이스뿐만 아니라 나이키, 퓨마 등 수많은 스포츠, 아웃도어 브랜드들에 오이엠(OEM·주문자상표부착) 방식으로 의류와 신발 등을 납품한다. 스포츠, 아웃도어 오이엠 업체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아직 헬퍼인 파빈은 서른명이 한 조로 일하는 작업대 맨 끝에서 하루 250~300켤레씩 쏟아져나오는 신발의 삐져나온 실밥을 잘라냈다. 흘러내린 본드도 깔끔하게 뜯어냈다. 갓 만들어진 신발이 내뿜는 독성에 종종 눈이 아렸다. 일할 때는 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가는 데만 4분이 걸리니, 볼일을 보려면 10분은 자리를 비워야 한다. 조장이나 매니저한테 갖은 욕설을 듣느니, 아침 8시30분부터 점심때까지 참는다. 파빈은 다른 노동자들보다 더 오래 참아야 한다. 헬퍼의 점심시간은 오퍼레이터 등 다른 노동자들보다 2시간 늦은 오후 2시부터 딱 30분 동안이다. 몇 달 더 일해 오퍼레이터가 되면 파빈은 동생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 11시께, 기다리던 월급 명세서가 나왔다. 뭔가 이상했다. 약 3800타카(약 5만원)이던 이전 월급에서 700타카(약 9300원)밖에 오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월급날이 보통때보다 4~5일 늦어질 때부터 수상했다. 수당이 문제였다.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방침에 따라 회사는 기본급을 올렸다. 대신 의료비 등 수당을 확 줄였다. 총액이 파빈이 기대했던 금액보다 낮을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자인과 색감의 운동화.
지난 1월 방글라데시 치타공 외곽 영원무역 공장에서 미싱보조사로 일하다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파빈 악터의 가족이 대나무를 엮어 만든 자신들의 집 앞에 서 있다. 류이근 기자
“노동자대표가 누구야”
회사쪽에 불려간 이들
양쪽 손목·발목이 깊게 베였다 분노한 노동자 수천명의 시위
그러나 노동자는 ‘괴한’으로
회사는 ‘피해자’로 보도됐다 3년 전에도 월급날이었다. 파빈이 일하던 한국수출가공공단에서 카르나풀리강을 건너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곳에 치타공수출가공공단(CEPZ)이 위치하고 있다. 영원무역의 방글라데시 공장 대부분이 이곳에 모여 있다. 2010년 12월11일, 재단사 마슈는 여느 때처럼 출입문짝도, 후미등도 없는, 찌그러진 냄비처럼 곳곳이 파인 고물 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향했다. 치타공수출가공공단 정문 앞에 8시쯤 내려 영원무역 공장까지 걸어갔다. 특별할 것 없는 아침이었다. 전날 퇴근할 때 받아 든 월급 명세서가 못마땅하긴 했다. 최저임금이 오른다는 정부 발표에 좋아했는데, 막상 손에 쥔 월급은 5400타카(약 7만2000원)가 안 됐다. 기대했던 액수보다 500타카(약 6700원)가량이 적었다. ‘결근도 한 번 안 하고 열심히 일했는데…’ 하지만 공장 안에 있는 누구도 불만을 섣불리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괜히 나섰다가 해고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 없이 오전이 지나갔다. 경찰이 경비실에 와 있는 게 이상하긴 했다. 전엔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제대로 오르지 않은 월급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한 친구가 마슈한테 주의를 줬다. “괜히 월급 갖고서 이러쿵저러쿵하지 마. 사장도 할 만큼 한 거야. 잘못 말했다간 우리만 손해봐.” 대화는 금세 끊겼다. 회사도 단속에 나섰다. “동요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라. 서로 월급 얘기하지 말고, 문제가 있으면 나를 찾아와라.” 누구도 이 말을 한 관리자를 찾아가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나, 한 여성의 목소리가 출입문 쪽에서 들려왔다. “우리는 밖에서 투쟁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여기서 뭣 하고 있는 거냐. 밖으로 나가자. 안 그러면 기계를 때려부수겠다.” 여성의 손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놀란 건 노동자들보다 회사 쪽이었다. 관리자들이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와 기계를 세웠다.
방글라데시 치타공 외곽에 있는 한국수출가공공단(KEPZ) 내 영원무역의 한 공장에서 여공들이 미싱을 돌리고 있다. 이곳은 지난 1월 최저임금 인상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미싱 보조사 파빈 악터가 일하던 공장이다.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돼 있어, 공장 노동자가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이다.
지난 1월 방글라데시 제2도시 치타공 외곽 한국수출가공공단(KEPZ)에 있는 영원무역 공장에서 최저임금 인상 시위 현장에 있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다리를 다친 청년 노비 알롬(22). 그가 총에 맞은 양쪽 대퇴부를 보여주고 있다. 류이근 기자
-남동생의 ‘노스페이스’ 잠바 뒤엔 방글라데시의 눈물이 있었네 ▷심층리포트 : 총, 특권, 거짓말: 글로벌 패션의 속살
-영원무역은… 내가 입은 ‘노스페이스’ 생산기지였네” ▷심층리포트 : 총, 특권, 거짓말: 글로벌 패션의 속살
-영원무역 “상상도 못할 일, 사실 아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