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시민들이 4일 수도 콜롬보에서 “우리에게 미래를 돌려달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고타바야 자라팍사 대통령의 사임과 경제위기에 항의하는 시위를 열고 있다. 콜롬보/EPA 연합뉴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는 스리랑카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며, 당국이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내각도 총사퇴했다. 시민들은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로이터> 통신 등 주요 외신은 4일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과 그의 형인 마힌다 라자팍사 총리를 제외한 각료 전원이 전날 사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디네시 구나와르데나 교육부 장관은 “대통령이 새 내각을 구성할 수 있도록 모든 장관이 사직서를 제출했다”며 이 결정은 경제 위기가 심화하는 상황에 대해 논의한 후 내려졌다고 말했다. 아지트 카브랄 중앙은행 총재도 경제난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밝혔다.
큰 위기에 빠진 라자팍사 대통령은 이날 공석이 된 각료 26명 가운데 4명을 임명한 뒤, 야당에게 내각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야당은 이를 거부하고, 새 총선을 치를 것을 요구하는 중이다.
스리랑카가 1948년 독립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빠진 이유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주요 산업인 관광업이 큰 타격을 입으며 외화 수입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지난 2월 말 현재 스리랑카의 외환 보유고는 20억달러(2조4320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절반 수준, 2년 전과 비교하면 4분의 1로 떨어졌다.
외환보유고가 급감하면서 화력 발전소를 돌리기 위한 석탄·석유와 식량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 오던 경제가 큰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석탄 수입이 줄어들며, 발전소를 돌리지 못해 스리랑카 정부는 ‘계획 정전’을 시행하는 중이다. 3월 말엔 정전 시간이 하루 24시간 가운데 절반이 넘는 13시간으로 늘어났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수도 콜롬보 등에서 대규모 시위에 나서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면서 관저를 급습했다. 이에 놀란 정부는 지난 1일 치안유지 등을 이유로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그와 함께 정부 비판을 억누르기 위해 페이스북·트위터 등 주요 소셜미디어의 사용을 금지했다. 이에 대한 시민들의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3일 이를 해제한 상태다. 전국에 선언된 통금 조처에도 3일 스리랑카 전국에서 2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미래를 돌려달라”며 시위를 이어갔다.
스리랑카 경제가 위기에 직면하게 된 또다른 이유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참여해 중국에 과도한 채무를 지고 각종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한 점이 꼽힌다. 스리랑카는 2017년 남부 함반토타 항구 건설 과정에서 거액의 빚을 졌으나 운영 실적은 저조해 항구 운영권을 약 11억달러를 받는 대가로 중국 자오상쥐그룹에 99년 동안 내줬다. 미국 등 서구에서는 이 일을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이 스리랑카와 같은 제3세계 국가들을 ‘채무의 함정’에 빠뜨린 대표적인 예로 꼽는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보면, 스리랑카 국내총생산에서 정부 부채의 비율은 2017년까지만 해도 70%대에 머물렀지만, 2021년에는 109.2%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스리랑카의 대중 채무는 약 33.8억달러(약 4조500억원)에 이른다.
이를 견디다 못한 라자팍사 대통령은 지난 1월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에서 외채상환 조건을 완화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코로나19로 급감한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대한 도움”도 요청했다. 스리랑카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중국과 경쟁 중인 인도는 지난 2월 5억달러의 대출을 결정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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