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태양빛을 머금은 달 호수의 이른 아침은 고요한 평화로움이다. 그러나 그같은 평화는 이곳을 둘러싼 오래된 종교적 갈등 탓에 생명을 위협받는 주민들의 불안감이 뒤엉킨 반쪽짜리일 뿐이다. 주민들은 관광객들이 북적대던 예전의 기억을 회상하며 온전한 평화를 그리워한다. 이른 아침 어디론가 부지런히 노를 젓는 할머니의 몸짓 속에서도 고단한 카슈미르인들의 현재를 어렵지않게 읽을 수 있다. 카슈미르/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인도의길인도의힘2부:새 ‘슈퍼파워’ 현장을 가다]
분쟁의 땅 “관광객 다시온다”
분쟁의 땅 “관광객 다시온다”
전쟁·지진 성처 깊어…모든 산업 고사상태
‘평화의 버스’뒤 희망새싹…옛 모습 찾길 바래” 만년설을 인 히말라야 산맥이 비행기 아래에 앉았다. “지상의 낙원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공항 광고판이 인도령 카슈미르의 중심도시 스리나가르의 첫 인사를 건낸다. 카슈미르, 인도와 파키스탄 영토로 갈라져 60년 동안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간 ‘화약고’. 첫눈엔 그 상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도시를 굽어보는 히말라야와 배 호텔 ‘하우스보트’가 끝없이 늘어선 맑디맑은 달 호수, 신혼부부와 관광객들의 발길, 새벽마다 호수 위에서 열리는 싱싱한 야채시장, 활기찬 아름다움은 상처를 가리고 있었다. 주말 저녁에는 가족나들이에서 돌아오는 차량으로 교통체증까지 일어났다. 이슬람 사원들에 모여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의 다른 지역들과는 다른 중앙아시아의 분위기가 진하게 풍겼다. 평화의 싹은 이곳에서 조심스럽게 움트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는 2004년 휴전을 선언하고 카슈미르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스리나가르와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의 무자파라바드 사이를 오가는 ‘평화의 버스’가 1년 전부터 2주에 한번씩 이산가족들을 싣고 달린다. 몇년 전까지 오후 5시가 되면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집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궜다고 주민들은 기억하지만, 이제는 밤 10시에도 거리에 인적이 있고 가게도 열려 있다. 그러나, 흉터는 깊다. 거리와 건물마다 중무장한 인도군인과 모래주머니 벙커가 사람들을 가로막는다. 인도령 카슈미르에만 인도군 80만명, 전세계에서 군대가 가장 밀집해 주둔하는 곳으로 꼽힌다. 도시 한복판에도 3~4년 전까지 분리주의 무장세력이 진지로 삼고 인도군과 시가전을 벌였던 건물이 총구멍으로 벌집이 된 채 서 있다. 달 호수 근처 호텔들의 절반 정도는 인도군이 점거해 병영으로 쓰고 있다. 인도-파키스탄 정부의 평화협상과 ‘평화의 버스’에 대해서도 인도 정부와 현지 카슈미르인들의 거리감은 멀기만 하다. 언제 어떻게 덥칠지 모르는 불안이 깔려 있는 카슈미르는 인도의 안보문제와 종교 갈등을 상징하는 곳이다.
영자신문 <그레이트카슈미르>의 편집장 자히르 웃딘은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카슈미르를 식민지로 삼아왔다. 그들의 평화협상에는 카슈미르인들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고 있다. 많은 카슈미르 주민들은 분단되지 않은 하나의 카슈미르를 원하고, 독립을 요구하는 여론도 높다. 주민들은 48년 유엔 결의안에 따라 주민투표로 카슈미르의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인도 정부는 무슬림이 다수인 주민들이 독립이나 파키스탄행을 선택할까봐 이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키스탄과 가까운 ‘카슈미르 벨리’ 지역에선 주민의 60~70%가 무슬림이다. ‘평화의 버스’ 운행이 시작됐을 때 버스에 타는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무장세력들의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카슈미르인들은 60년 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만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이제 이산가족 버스 상봉에 대한 환호는 많이 식어 있었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2만여명이 버스 탑승을 신청했지만, 지난 4월말까지 352명만이 허가를 받았다. 인도 정부는 보안문제와 지난해말 카슈미르 대지진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고 지적하지만, 주민들은 정부가 카슈미르인들을 믿지 못해 까다로운 절차를 내세우고 인권운동가나 정부에 비판적인 이들의 탑승도 막고 있다고 비판한다. 주민들은 카슈미르의 운명이 항상 외부에서 결정됐고, 고통은 언제나 카슈미르인들의 몫이었다는 분노를 안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종교 문제로 분리된 47년 카슈미르를 다스리던 왕이 무슬림이 다수인 주민들의 뜻을 묻지 않고 이곳을 인도에 귀속시키겠다는 증서에 서명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파키스탄이 군대를 동원해 일부를 점령하면서 카슈미르는 두 나라 땅으로 분단됐고, 그 사이엔 한국의 휴전선과 같은 통제선(LOC)이 그어졌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60년 가까이 이산가족의 아픔을 안고 살아왔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3번의 전쟁을 치렀고, 99년 카길전투 땐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경고로 전세계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두나라가 ‘영토’를 양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기에 89년부터 카슈미르 “해방”을 주장하는 분리주의 무장세력들이 봉기하면서 카슈미르는 ‘지옥’이 됐다. 카슈미르 분리독립을 두려워한 인도 정부는 주정부 총리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때마다 교체했고, 88년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자 카슈미르인들은 정부가 또다시 개입했다고 분노하면서 “선택권을 달라”며 시위에 나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봉기한 무장세력과 인도군 사이의 교전, 소탕작전으로 7만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인도군의 소탕작전으로 무장세력들은 현재 도시에서 쫓겨났지만, 농촌에선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이달초에도 괴한들이 잠무카슈미르주 남부 도다에서 힌두교도 민간인 35명을 학살했고, 최근 만모한 싱 인도총리의 스리나가르 방문을 앞두고 무장단체의 공격이 이어졌다. 봉기 초기에 무장세력들을 “자유의 전사”로 환영했던 많은 카슈미르인들 가운데 여전히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지만, 민간인들에 대한 그들의 폭력에 실망해 등을 돌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카슈미르 인권운동가들은 인도군이 무장세력을 진압한다며 무고한 민간인들을 체포·고문한 인권침해에 분노하고 있다. 변호사이자 ‘카슈미르실종자가족연합’의 파르베즈 임로즈 대표는 “무슬림 젊은이들은 무조건 무장세력이나 지지자로 취급받아 체포돼 고문을 받았고, 재판도 받지 못한 채 감옥에 갇혀 있다. 지난 3년 동안 300명이 넘는 어린이가 인도군과 무장세력의 교전 때문에 죽었다. 남성들이 무장단체에 가담하거나 체포·실종되면서,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절반 과부’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희생자들을 조사했고, 89년 이후 7만명이 죽고 10만명이 실종됐다고 추산하고 있다.” 혼란은 경제를 마비시켰고, 이는 삶을 더욱 옥죄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카슈미르는 무굴제국과 영국 식민통치 시절부터 최고의 관광지로 꼽혀 왔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정교한 수공예 산업 등도 발달했지만, 유혈사태가 심각해지면서 모든 산업이 고사상태에 빠졌다. 일자리도 희망도 없기 때문에 유일한 ‘살 길’을 찾아 무장세력에 가담한 젊은이들도 많았다. 독립을 요구하는 정치단체 마하즈에아자디의 아잠 인킬라비 대표는 “카슈미르가 분단되면서 이 지역의 풍부한 수자원, 목재, 식품, 관광자원을 제대로 개발할 수 없었다. 우리 농산물이 국제시장에 팔릴 수 있다면 매년 30억달러의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실업자들의 정신적 문제도 심각하다. 인도는 군대를 철수시켜 카슈미르를 비무장화해야 하며, 우리는 우리 정부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인도나 파키스탄 정부가 무슬림과 힌두교도까지 포함한 전체 카슈미르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카슈미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요구였지만, 이는 문제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카슈미르 내에도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부터 인도 내부에서 자치권을 얻어야한다는 온건파, 파키스탄과의 통일을 원하는 이들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엇갈리고, “무엇이 진정한 카슈미르인의 목소리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폭력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구호단체 헬프파운데이션이 운영하는 고아원 셰자르홈에 살고 있는 모함마드 아수프 미르(14)의 아버지는 평범한 재단사였지만 94년 마을에 들이닥친 인도군과 무장세력의 교전으로 숨졌다. “아버니는 크리켓을 하고 있다가 총탄에 목숨을 잃었고 엄마와 누나, 동생과 내가 남겨졌다. 농사를 지어 우리를 키우던 어머니는 이제 몸져 누웠다. 여기서 공부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과학을 좋아하고 파일럿이 되고 싶다.” 함께 있던 무다시르 아흐마드 로네(13)의 꿈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사”다. 농부였던 그의 아버지도 98년 군대와 무장세력의 전투에 휘말려 숨졌다. 고아원에 처음 왔을 때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거리에서 군인들을 보고 “아버지를 죽이던 군인들이 생각나” 울음을 터뜨렸던 빌랄(13)은 이제 차분한 ‘보통의’ 아이로 돌아왔다.
카슈미르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평화롭고 평범한 삶’이다.
대대로 달호수에서 배 호텔인 하우스보트를 운영해온 바샤라트(28)는 “어렸을 때 전세계에서 몰려온 관광객들과 함께 뛰어놀곤 했는데 ‘혼란’이 시작되고 관광객들이 발길이 끊기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외지에 나가 장사를 해야했다. 관광객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으니 카슈미르가 옛 모습을 되찾기를 고대한다. 전쟁과 지난해 겨울 대지진 등 카슈미르에는 계속 아픔이 많았지만 이제는 좋은 일들만 생기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스리나카르(잠무·카슈미르주)/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평화의 버스’뒤 희망새싹…옛 모습 찾길 바래” 만년설을 인 히말라야 산맥이 비행기 아래에 앉았다. “지상의 낙원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공항 광고판이 인도령 카슈미르의 중심도시 스리나가르의 첫 인사를 건낸다. 카슈미르, 인도와 파키스탄 영토로 갈라져 60년 동안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간 ‘화약고’. 첫눈엔 그 상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도시를 굽어보는 히말라야와 배 호텔 ‘하우스보트’가 끝없이 늘어선 맑디맑은 달 호수, 신혼부부와 관광객들의 발길, 새벽마다 호수 위에서 열리는 싱싱한 야채시장, 활기찬 아름다움은 상처를 가리고 있었다. 주말 저녁에는 가족나들이에서 돌아오는 차량으로 교통체증까지 일어났다. 이슬람 사원들에 모여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힌두교도가 다수인 인도의 다른 지역들과는 다른 중앙아시아의 분위기가 진하게 풍겼다. 평화의 싹은 이곳에서 조심스럽게 움트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는 2004년 휴전을 선언하고 카슈미르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스리나가르와 파키스탄령 카슈미르의 무자파라바드 사이를 오가는 ‘평화의 버스’가 1년 전부터 2주에 한번씩 이산가족들을 싣고 달린다. 몇년 전까지 오후 5시가 되면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집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궜다고 주민들은 기억하지만, 이제는 밤 10시에도 거리에 인적이 있고 가게도 열려 있다. 그러나, 흉터는 깊다. 거리와 건물마다 중무장한 인도군인과 모래주머니 벙커가 사람들을 가로막는다. 인도령 카슈미르에만 인도군 80만명, 전세계에서 군대가 가장 밀집해 주둔하는 곳으로 꼽힌다. 도시 한복판에도 3~4년 전까지 분리주의 무장세력이 진지로 삼고 인도군과 시가전을 벌였던 건물이 총구멍으로 벌집이 된 채 서 있다. 달 호수 근처 호텔들의 절반 정도는 인도군이 점거해 병영으로 쓰고 있다. 인도-파키스탄 정부의 평화협상과 ‘평화의 버스’에 대해서도 인도 정부와 현지 카슈미르인들의 거리감은 멀기만 하다. 언제 어떻게 덥칠지 모르는 불안이 깔려 있는 카슈미르는 인도의 안보문제와 종교 갈등을 상징하는 곳이다.
영자신문 <그레이트카슈미르>의 편집장 자히르 웃딘은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카슈미르를 식민지로 삼아왔다. 그들의 평화협상에는 카슈미르인들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고 있다. 많은 카슈미르 주민들은 분단되지 않은 하나의 카슈미르를 원하고, 독립을 요구하는 여론도 높다. 주민들은 48년 유엔 결의안에 따라 주민투표로 카슈미르의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인도 정부는 무슬림이 다수인 주민들이 독립이나 파키스탄행을 선택할까봐 이를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키스탄과 가까운 ‘카슈미르 벨리’ 지역에선 주민의 60~70%가 무슬림이다. ‘평화의 버스’ 운행이 시작됐을 때 버스에 타는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무장세력들의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카슈미르인들은 60년 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만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이제 이산가족 버스 상봉에 대한 환호는 많이 식어 있었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2만여명이 버스 탑승을 신청했지만, 지난 4월말까지 352명만이 허가를 받았다. 인도 정부는 보안문제와 지난해말 카슈미르 대지진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고 지적하지만, 주민들은 정부가 카슈미르인들을 믿지 못해 까다로운 절차를 내세우고 인권운동가나 정부에 비판적인 이들의 탑승도 막고 있다고 비판한다. 주민들은 카슈미르의 운명이 항상 외부에서 결정됐고, 고통은 언제나 카슈미르인들의 몫이었다는 분노를 안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종교 문제로 분리된 47년 카슈미르를 다스리던 왕이 무슬림이 다수인 주민들의 뜻을 묻지 않고 이곳을 인도에 귀속시키겠다는 증서에 서명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파키스탄이 군대를 동원해 일부를 점령하면서 카슈미르는 두 나라 땅으로 분단됐고, 그 사이엔 한국의 휴전선과 같은 통제선(LOC)이 그어졌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60년 가까이 이산가족의 아픔을 안고 살아왔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3번의 전쟁을 치렀고, 99년 카길전투 땐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경고로 전세계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두나라가 ‘영토’를 양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기에 89년부터 카슈미르 “해방”을 주장하는 분리주의 무장세력들이 봉기하면서 카슈미르는 ‘지옥’이 됐다. 카슈미르 분리독립을 두려워한 인도 정부는 주정부 총리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때마다 교체했고, 88년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자 카슈미르인들은 정부가 또다시 개입했다고 분노하면서 “선택권을 달라”며 시위에 나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봉기한 무장세력과 인도군 사이의 교전, 소탕작전으로 7만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인도군의 소탕작전으로 무장세력들은 현재 도시에서 쫓겨났지만, 농촌에선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이달초에도 괴한들이 잠무카슈미르주 남부 도다에서 힌두교도 민간인 35명을 학살했고, 최근 만모한 싱 인도총리의 스리나가르 방문을 앞두고 무장단체의 공격이 이어졌다. 봉기 초기에 무장세력들을 “자유의 전사”로 환영했던 많은 카슈미르인들 가운데 여전히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지만, 민간인들에 대한 그들의 폭력에 실망해 등을 돌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카슈미르 인권운동가들은 인도군이 무장세력을 진압한다며 무고한 민간인들을 체포·고문한 인권침해에 분노하고 있다. 변호사이자 ‘카슈미르실종자가족연합’의 파르베즈 임로즈 대표는 “무슬림 젊은이들은 무조건 무장세력이나 지지자로 취급받아 체포돼 고문을 받았고, 재판도 받지 못한 채 감옥에 갇혀 있다. 지난 3년 동안 300명이 넘는 어린이가 인도군과 무장세력의 교전 때문에 죽었다. 남성들이 무장단체에 가담하거나 체포·실종되면서,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절반 과부’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희생자들을 조사했고, 89년 이후 7만명이 죽고 10만명이 실종됐다고 추산하고 있다.” 혼란은 경제를 마비시켰고, 이는 삶을 더욱 옥죄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카슈미르는 무굴제국과 영국 식민통치 시절부터 최고의 관광지로 꼽혀 왔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정교한 수공예 산업 등도 발달했지만, 유혈사태가 심각해지면서 모든 산업이 고사상태에 빠졌다. 일자리도 희망도 없기 때문에 유일한 ‘살 길’을 찾아 무장세력에 가담한 젊은이들도 많았다. 독립을 요구하는 정치단체 마하즈에아자디의 아잠 인킬라비 대표는 “카슈미르가 분단되면서 이 지역의 풍부한 수자원, 목재, 식품, 관광자원을 제대로 개발할 수 없었다. 우리 농산물이 국제시장에 팔릴 수 있다면 매년 30억달러의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실업자들의 정신적 문제도 심각하다. 인도는 군대를 철수시켜 카슈미르를 비무장화해야 하며, 우리는 우리 정부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인도나 파키스탄 정부가 무슬림과 힌두교도까지 포함한 전체 카슈미르인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카슈미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 한결같은 요구였지만, 이는 문제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카슈미르 내에도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부터 인도 내부에서 자치권을 얻어야한다는 온건파, 파키스탄과의 통일을 원하는 이들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엇갈리고, “무엇이 진정한 카슈미르인의 목소리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폭력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고아원 셰자르홈에 살고 있는 아이들. 14살 소년 모함마드 아수프 미르는 1994년 인도군과 무장세력의 교전으로 아버지를 잃고 힘겨운 세월을 보냈지만 여기서 공부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며 파일럿의 꿈을 키우고 있다. 농부 아버지를 잃은 무다시르 아흐마드 로네(13·왼쪽)의 꿈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사”다. 스리나가르/임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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