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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시아·태평양

[인도기행] 영토분쟁에 신음하는 ‘지상낙원’ 카슈미르

등록 2006-06-02 13:53수정 2006-06-05 09:59

자마 마스지드 힌두교 사원. 신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염원이 담겨있다. 아니 휴식이자 쉼터가 더 맞으려나.
자마 마스지드 힌두교 사원. 신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염원이 담겨있다. 아니 휴식이자 쉼터가 더 맞으려나.


힌두교 나라 속의 무슬림지역…중동에 온 듯한 착각

“카슈미르에선 누구의 말도 믿지마.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진마.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러는 거야.”

카슈미르 출신인 한 인도 친구는 스리나가르로 떠나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카슈미르를 덥친 잔인한 분쟁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는 판디트(힌두교 상위계층) 출신이지만, “이제 어떤 종교나 무리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델리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한시간쯤 날아갔을까, 아래로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눈부시다. 풍요로운 녹지대 위로는 양철지붕들이 햇빛에 반짝이고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펼쳐진다.

만년설을 넘으니 중앙아시아다.

힌두교도가 대부분인 인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인도령 카슈미르 인구의 70% 이상은 무슬림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왕조와 인도 무굴제국이 오랫 동안 이 지역을 통치했고, 아프간과 페르시아(이란)에서 이주한 무슬림들이 이 비옥한 지역에 정주해 살아왔다. 곳곳에 들어선 유서 깊은 이슬람사원들과 하루에 5번씩 기도를 올리는 무슬림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 곳은 중동의 분위기를 풍긴다.

서로 이곳을 자기 땅이라 여기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99년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슬픈 곳이지만, 인도령 잠무·카슈미르주의 중심도시인 스리나가르 공항을 빠져나오자 깨끗한 공기와 햇살이 탄성을 지르게 만든다. 무굴제국의 황제였던 자항기르는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카슈미르임에 틀림없다”는 말을 남겼다.

나무배로 된 호텔인 하우스보트가 끝없이 줄지어 있는 달호수가 도시의 동쪽에 조용히 앉아 있다. 시카라라고 불리는 배를 타고 수로처럼 이어진 호수를 오가느라면 투명한 물 아래로 해초와 작은 물고기들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미로처럼 복잡한 호수 위로는 하우스보트와 주민들의 집과 밭이 어우려져 있다. 지금은 이리도 한적하고 조용하지만 80년대말까지 이곳은 전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도 여름 한창 때의 경포대처럼 붐볐다고 한다.

한나절의 달 호수. 멀리 보이는 인도히말라야의 백년설과 호숫물을 가르는 형형색색의 조각배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한나절의 달 호수. 멀리 보이는 인도히말라야의 백년설과 호숫물을 가르는 형형색색의 조각배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나무를 정교하게 조각해 장식한 하우스보트들은 영국 식민통치의 유산이라고 한다. 영국인들은 카슈미르에 매혹됐지만, 당시 카슈미르의 왕은 영국인들이 이곳 땅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달 호수에 집배를 짓는 ‘편법’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영국인들이 오기 전에도 수많은 이들이 카슈미르에 매혹됐다. 인도를 점령한 무굴제국의 통치자들은 델리의 열기를 피해 녹색 고지대인 카슈미르에서 여름을 보내곤 했다. 왕들은 스리나가르와 외곽에 예술적인 정원들을 만들었고, 자항기르 황제가 만든 샬리마르 정원 등 당시의 정원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인도-파키스탄 카슈미르 분쟁사
인도-파키스탄 카슈미르 분쟁사
새벽이면 농민들이 갇 수확한 싱싱한 농산물들을 배에 가득 싣고와 파는 수상 야채시장은 상인들이 배를 저어갈 때마다 순간순간 변하는 활력으로 보는 이를 매혹시켰다. 아침이면 학교에 가는 아이들도 조용히 배를 저어 육지로 나간다.

카슈미르가 ‘아시아의 화약고’라는 것은 거리와 건물마다 검문에 나서는 인도군의 모습에서 느껴졌다. 80만의 인도군이 주둔하는 이곳은 전쟁이 선포되지 않은 곳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대가 밀집해 주둔하는 곳이라고 한다. 달 호수 주변의 호텔들도 인도군이 접수해 병영으로 쓰고 있어 곳곳에 철조망이 처져 있다.

2004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 평화협상이 시작됐고, 2005년 봄에는 인도와 파키스탄령으로 분단된 두 카슈미르 사이를 오가는 ‘평화의 버스’ 운행이 시작됐다. 만모한 싱 인도 총리도 올들어 두번이나 스리나가르를 방문해 온건파 분리주의 지도자들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이런 변화에 대해 카슈미르인들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카슈미르의 영자지 <그레이터카슈미르>의 자히르 웃 딘 편집장은 대뜸 “카슈미르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인도 정부나 외국언론에서 쓰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대뜸 말했다. 시골에선 인도군의 무장세력 소탕작전이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인도군에 체포된 뒤 실종되는 등 인권유린도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2003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카슈미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도군의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했다가 인도 정부에 ‘찍혔다’는 그는 인도 정부가 여권 재발급도 거부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비극의 발단은 카슈미르 왕의 ‘잘못된 선택’

주민들은 카슈미르의 운명이 항상 외부에서 결정됐고, 고통은 언제나 카슈미르인들의 몫이었다는 분노를 안고 있다.

1846년 영국인들은 이곳을 통치하던 시크교도를 물리친 다음 힌두교도 왕을 내세워 간접통치를 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종교 문제로 분리된 47년, 카슈미르의 왕이 무슬림이 다수인 주민들의 뜻을 묻지 않고 이곳을 인도에 귀속시키기로 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반발한 파키스탄이 일부를 점령하면서 카슈미르는 두개로 분단됐고, 그 사이엔 한국의 휴전선과 같은 통제선(LOC)이 그어졌다. 주민들의 대부분은 60년 가까이 이산가족의 아픔을 안고 살아왔다. 87년 카슈미르주 정부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자 주민들은 인도 정부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개입했다고 분노해 대규모 시위에 나섰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89년 카슈미르 “해방”을 요구하는 분리주의 무장세력이 봉기했다. 이후 무장세력과 인도군의 교전과 체포, 소탕작전으로 7만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이른 아침의 달 호수. 학교가는 아이들과 출근하는 이들이 뒤섞인 아침의 달 호수는 놀랄만큼 깨끗한 태양빛의 반사로 인한 눈부심의 순간이다.
이른 아침의 달 호수. 학교가는 아이들과 출근하는 이들이 뒤섞인 아침의 달 호수는 놀랄만큼 깨끗한 태양빛의 반사로 인한 눈부심의 순간이다.

스리나가르에서 구호단체 헬프파운데이션을 운영하는 니가트 샤피(56)는 97년부터 카슈미르 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남편을 잃거나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을 돕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만난 키카 훌쩍 큰 아이들은 영어와 과학 공부를 좋아하고 크리켓에 열중하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말을 붙이니 수줍어하던 소년들은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아버지들이 어느날 갑자기 인도군과 무장세력의 교전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가족들이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를 이야기했다. 부모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아이들은 처음 이곳에 올 때 말을 잃고 있었지만 정신과 상담 등을 통해 이렇게 희망을 찾는다. 이곳에서는 민간인과 무장세력, 인도군의 아이를 가리지 않고 돌보며 서로 친구가 되도록 한다.

전쟁이란 힘으로 강자의 뜻을 강요하려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며, 결국 육체적 힘이 가장 약한 여성과 어린이가 가장 무참하게 짓밟힌다. 전쟁은 항상 너는 누구편이냐 우리편이냐 적군편이냐는 편가르기를 요구한다. 여기서 누구편에 서지 않고 인간의 편에 서기란 어려운 과제다. 사피는 역시 인도 정부의 카슈미르 정책과 인도군의 인권유린에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더이상의 무장투쟁이나 유혈사태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한다. 나는 그가 분쟁의 한 가운데서 인간의 편에 서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어떤 국가도 영토분쟁에서 물러나려는 법은 없다. 거기에 휘말려 언제 어떻게 희생될지 모른 채 살아가는 이들은 카슈미르인들이다. 분단과 전쟁의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힘겨운 과제이며, 얼마나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내는지는 우리 또한 수십년 동안 절감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와 얘기하는 동안 가끔 목이 메었다.

해질무렵의 달 호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저무는 태양은 호수에 그 여운을 길게 남긴다.
해질무렵의 달 호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저무는 태양은 호수에 그 여운을 길게 남긴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대뜸 “광주항쟁 아느냐”

어느 일요일 샤피를 따라 카슈미르의 사원들에 갔다.

수피사원인 술탄 아르파인 셰이크 함자 마크툼 사원, 스리나가르를 굽어보는 요새 아래 있는 이곳은 주민들이 너무나 편안하게 찾아오는 생활의 일부 같았다. 묘지가 있고, 마을을 내려다보는 창가에는 사람들이 꼭 기도를 하지 않더라도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이제 돌도 안된 어린아이의 첫 머리를 깎아주기 위해 이곳을 찾은 부모들도 있었다. 심지어 이곳에선 인도군 병사마저도 아무런 긴장감이 없이 주민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카슈미르의 이슬람은 수피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정통’ 수니파나 시아파와도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곳 무슬림들은 중동 지역에 비해 훨씬 자유분방한 분위기였고, 거리의 여성들도 머리에 히잡을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의상 역시 형형색색으로 매우 화려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수니파 사원 자마 마스지드는 수백년 된 규모가 큰 사원이었다. 수백개의 나무 기둥을 인 사원은 마침 기도시간이어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 같은 불청객이 들어와 아무런 허가증 없이도 사진을 찍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은 이란이나 쿠웨이트 같은 중동지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호수 곁에 흰대리석으로 지어진 하즈라트발 사원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머리카락이 보관돼 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었다. 사원 밖 풀밭에는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이 편하게 앉아 있고 아이들이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여기가 ‘무시무시한’ 카슈미르라는 사실도 잠시 잊고 마냥 관광객처럼 아름다운 자연에 빠져든다.

그러나 카슈미르 인권운동단체연합에서 일하는 변호사 파르베즈 임로즈와 카람 파르베즈, 교수인 바시르 아흐메드 등은 나에게 숨겨진 모습을 보라고 말했다. 93년 설립된 카슈미르실종자가족연합 회원들이기도 한 이들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대뜸 광주민주항쟁을 아냐고 묻는다. 그들은 한국의 군사정권 아래 일어난 광주민주항쟁과 광주를 비롯한 한국 민주화운동가들의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도 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가 아시아 민주화운동의 한 상징과 희망이 됐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인도군의 고문과 살해, 무차별 투옥이 계속되고 있다며 전날도 보안군이 2명의 소년을 잡아가 고문을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특히 인도군에 잡혀간 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실종자와 그 가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인도 정부가 카슈미르인들이 대부분 무슬림이기 때문에 이슬람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라고 매도하고 있다며, 자신들은 “민주적, 세속적, 독립적인 카슈미르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새벽공기를 가르고 나온 수상야채시장의 상인들. 각자 자신의 수상가옥에 있는 작은 마당에서 직접 기른 야채들을 가지고 나왔다.
새벽공기를 가르고 나온 수상야채시장의 상인들. 각자 자신의 수상가옥에 있는 작은 마당에서 직접 기른 야채들을 가지고 나왔다.

여전한 폭력과 죽음…사람은 남고 명분은 가라

카슈미르는 너무 아름다워서 슬펐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90년대에 비해 시가전 같은 눈에 보이는 전투가 많이 잦아들었지만, 우리가 스리나가르를 다녀온 이후에도 그곳에서 계속되는 폭력과 죽음에 대한 기사들을 거의 날마다 접할 수밖에 없었다. 5월 한달 동안 스리나가르 남쪽에서 힌두교도 민간인 35명이 학살당했고, 스리나가르 한복판에서 벌어진 집회가 공격을 받았고, 군함에 타고 있던 어린 아이들이 익사한 데 항의해 인도군 철수를 요구하던 주민들의 집회에 군대가 총격을 가해 2명이 죽고, 관광버스가 공격을 받아 30명의 관광객이 다쳤다.

영토든 종교든 온갖 명분을 동원한 전쟁은 ‘낙원’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아이들은 눈 앞에서 부모가 죽고 끌려가는 것을 봤고,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하고 남편과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과 폭탄의 공포,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불안, 빈곤의 고통 속을 통과해야 한다. 모든 전쟁은 그런 것이다.

어떤 명분으로도 낙원이 한 순간에 지옥이 되고, 거기서 도망칠 힘이 없는 약자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전쟁과 점령의 진실을 가리지 못한다. 팔레스타인에서 이라크, 카슈미르까지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구호나 명분이 아닌 사람이다.

한밤의 달 호수. 뜨겁게 달궈졌던 호수는 프러시안불루빛의 잔잔함으로 변화된다.
한밤의 달 호수. 뜨겁게 달궈졌던 호수는 프러시안불루빛의 잔잔함으로 변화된다.

스리나가르(인도 잠무·카슈미르주)/글 박민희, 사진 임종진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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