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테러전 명분 6년새 100억달러 지원…부시는 ‘침묵’
영 “상황 검토중” 제재 유보적…약점 간파한 군부 ‘여유’
영 “상황 검토중” 제재 유보적…약점 간파한 군부 ‘여유’
3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올해 들어 장기독재 야욕을 노골화하면서 사법부와 민주화세력, 이슬람주의 세력 등과 첨예한 갈등을 빚어왔다. 국내 지지기반 또한 상당부분 떨어져나갔다. 그럼에도 그가 과거 박정희 군사독재의 ‘10월 유신’과 유사한 쿠데타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육군참모총장 자리를 놓지 않고 있는 그가 국내 반발은 무력으로 억누를 수 있고, 대테러전쟁을 주도하는 미국과 영국의 뒷배에 기대어 국제사회의 비판과 제재를 무력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실제 중동을 방문 중인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4일 파키스탄에 대한 경제원조 재검토를 비치면서도 “원조의 일부는 대테러전쟁 수행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며 “부시 대통령의 최대 관심은 대테러전쟁을 통해 미국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세차례나 강조했다. <뉴욕타임스>는 라이스 장관의 언급을 “원조를 계속하겠다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지난 8월 미국의 한 연구기관은 2001년 9·11 이후 파키스탄에 대한 미국의 지원액이 적어도 100억달러에 이르며, 이 가운데 75%가 군부지원과 무기구입에 사용됐다고 밝힌 바 있다.
더욱이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번 사태에 대해 아예 입을 다물고 있다. ‘민주주의의 확산’을 내세워 지난 9월 미얀마 군정의 유혈 진압에 대해 온갖 제재를 언급하며 맹비난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무샤라프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 직전 아프간·이라크 전쟁을 총괄하는 미군 중앙사령부 사령관인 윌리엄 펄론 제독과 만났다며, 미국이 비상사태를 동의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2008~2011년 4억8천만파운드(약 9000억원)를 지원할 계획인 영국도 제재에 나서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 외무부 대변인은 “새로운 상황이 파키스탄의 지원 계획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검토할 계획”이라면서도, 언제가 될지, 지원규모에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는 답변을 피했다고 <비비시>(BBC) 방송이 보도했다.
미국과 영국의 이런 태도는 이번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악화하고 있는 아프간의 대테러전쟁에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미·영의 아킬레스건을 잘 알고 있는 무샤라프 쪽은 오히려 여유롭다. 무샤라프의 보좌진들은 “미국의 고위 정치인들로부터 어떤 전화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게다가 무샤라프는 비상사태 선포와 총선 연기에 대해 항의하려는 부시 대통령과 미 고위 관리들의 전화통화를 거부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무샤라프의 측근 타리크 아짐 칸 정보차관은 “미 고위층은 자칫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 ‘파키스탄의 민주주의’보다 ‘안정적인 파키스탄’을 바란다”며 “우리 ‘친구’들(미국)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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