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시각) 로힝야 난민들이 집단 거주하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쿠투팔롱 난민캠프 모습. 콕스바자르/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해 9월부터 아시아평화인권디딤돌(아디·ADI)이 진행한 인터뷰에서 로힝야 학살 생존자들은 한결같이 ‘정의를 원한다’ ‘우리의 권리를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이 말하는 권리와 정의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로힝야는 늦춰 잡아도 미얀마(버마) 시민권법(1982)이 토착민족으로 인정하는 기준인 ‘1823년’ 훨씬 이전에 라카인 지역에 정착했다. 이들은 불교를 믿는 라카인족 중심의 주류문화와 공존해왔다. 불교와 이슬람 경구가 각각 새겨진 16세기 동전, 무슬림에 대한 기록이 새겨 있는 비석 등이 이들의 존재를 뒷받침한다.
1948년 독립 이후에도 로힝야족은 다른 민족과 평등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1954년 우누 초대 총리는 로힝야는 버마 종족이며 다른 소수민족과 동등한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로힝야는 관련 법령에 따라 시민권을 가졌고, 투표권을 행사했다. 일부는 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60년 버마고등법원은 ‘아라칸 무슬림(로힝야족) 축출명령을 취소하라. 그들은 버마연방의 시민이다’라고 판결했다. 방송국은 로힝야 언어의 프로그램도 송출했다. 1962년 정부는 라카인주 북부 아라칸 지역을 별도의 행정자치구역으로 개편했다.
그러나 1962년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네윈은 불교-버마족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했다. 소수민족의 자치권도 부정해 무력분쟁이 발생했다. 화력의 우위를 앞세운 군부는 사실상 소수민족 전체를 토벌하려 했고, 사회 전반에서 이들을 제도적으로 배제하고 차별했다. 로힝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8년 군부의 나가민(용왕) 작전으로 20만명이 방글라데시 국경 너머로 피신했다가 귀환했다. 1982년 제정된 시민권법은 로힝야족을 국가가 인정하는 135개의 소수민족에서 제외했고, 사실상 시민권을 박탈했다.
1990년 총선에서 민족민주동맹(NLD)이 압승했으나 군부는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민주화운동을 탄압했고, 로힝야족에 대한 공격도 강화했다. 1991년 군부의 공격으로 25만명이 방글라데시로 피신했다. 대다수는 귀환했으나, 3만여명은 최근까지 난민캠프에서 살았다. 2012년 발생한 불교도 여성 살해 사건과 무슬림 순례자들에 대한 보복 살해 사건은 무력충돌로 악화되었다. 이를 빌미로 경찰과 군대는 로힝야 거주지역을 공격하고 14만명을 난민캠프에 가뒀다. 국제구호단체가 지급하는 식량 외에 모든 지원도 금지했다.
이 사건 이후 로힝야에 대한 박해는 미얀마 전역의 일상으로 확대됐다. 민간인들마저 당국의 명시적·암묵적 허가 속에 박해에 가담했다. 로힝야는 이웃 마을을 방문할 때도 돈을 내고 허가를 받아야 했다. 종교 활동도 제한됐다. 학교는 아이들을 차별했고, 직업 선택에 대한 차별도 심해졌다. 결혼도 돈을 내고 허가증을 받아야 했으며, 2명 이상 자녀를 낳는 것은 법으로 금지됐다. 이를 어기면 구타당하고 벌금을 내거나 경우에 따라 감옥에 가야 했다.
로힝야 민간인들은 열린 감옥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처지가 됐다. 그래서 일부는 해상난민으로 떠돌거나, 약 300명으로 추정되는 극소수는 ‘단검’으로 무장한 저항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민간인들에 대한 집단살해, 집단강간, 방화 그리고 75만명의 난민이었다.
로힝야는 집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 로힝야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구제가 우선이다. 시민권을 부여하고 차별적 제도와 관행을 없애고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순탄치만은 않을 이들의 여정에 우리도 힘을 보탤 때다.
김기남 아디 상근활동가(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