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베트남 빈즈엉에서 벌어진 반중시위. 동아시아 해역을 둘러싼 중국과 관련 국가들의 갈등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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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대외정책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명나라 때 정화의 대원정과 그 갑작스런 폐기다.
정화 함대는 1404~1433년 7차례의 대항해를 통해서 동아프리카까지 가며 인도양 전역을 누볐다. 유럽 세력의 제국주의와 서세동점의 시작인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1497년 바스쿠 다가마의 희망봉 항해보다도 한 세기 가까이 앞선다. 정화의 함대는 콜럼버스와 다가마의 항해단과는 달리 동원 선박이 최대 3500척, 인원이 3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대였다. 콜럼버스의 캐러벨선에 비하면, 정화의 선박은 30배나 컸다.
정화의 원정대는 적대적이었던 스리랑카의 왕을 포로로 잡아 베이징으로 압송하기도 했다. 나중에 유럽 세력들이 이 지역에 구축한 식민지를 당시 충분히 만들 수도 있었다. 원정을 지시한 영락제가 죽고 나서는 정화 함대의 원정 금지에서 더 나아가 배를 해체하고 원정 기록까지 파기했다. 명은 해금정책으로 돌아섰고, 청으로까지 이어졌다. 중국이 정화의 대원정 같은 정책을 이어갔다면 세계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주장한다. 유럽은 동양으로 올 수가 없었고, 중국은 근대화를 먼저 이룩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왜 그때 중국은 정화의 대원정 프로젝트를 폐기했나? 역사가들이 합의하는 공통분모는 당시 어느 지역보다도 문명과 경제력이 앞선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정화의 대원정이 비용에 비해 실익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명의 안보 상황과도 연관이 된다. 정화의 원정이 완전히 중단될 즈음이면, 북방의 새로운 강자 몽골의 오이라트가 흥기했다. 정통제가 오이라트에게 포로로 잡히는 토목의 변을 당했다. 명으로서는 전통적인 안보위협지역인 내륙의 북서방면을 놔두고 한가롭게 동남해안을 통한 바깥세계로 진출할 현실적 여건이 아니었다.
근대 이후 중국의 안보 환경과 구도는 180도 바뀐다. 안보의 무풍지대였던 동남해안 쪽은 중국의 최대 안보취약지대가 됐다. 중국을 반식민지로 만들었던 새로운 ‘오랑캐’들인 서구 세력들이 밀고 들어오는 통로가 됐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으로서도 전략자원과 통상을 확보하는 사활적인 출구가 됐다.
중국이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과 영유권 다툼을 벌이는 남중국해의 시사군도(파라셀군도) 주변 해역에서 독자적인 석유시추를 감행했다. 베트남에서는 반중국 폭동이 일어나는 등 1970년대 이후 동아시아 해역을 둘러싼 관련 국가들의 갈등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는 중국의 ‘제2의 정화 대원정’인가? 정화 대원정은 선택사항이었으나, 지금 중국의 동남해안 확보와 진출은 필수사항이다. 정화 대원정은 저항이 없었지만, 지금은 미국을 위시한 아시아 동맹국들의 필사적 반발이 있다. 팡펑후이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은 15일 자신들의 동남해안 진출과 확보를 저지하려는 주적인 미국의 수도에서 시사군도의 석유시추는 계속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는 “미국은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긴장에 대해 객관적 관점을 유지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훼손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동남해안에 대한 안보 위협은 일본 왜구로부터 시작됐다. 그 위협의 절정인 한반도의 임진왜란은 명 붕괴의 방아쇠가 됐다. 그런 일본의 아베 정권이 베트남에서 반중 폭동이 일어난 15일 해외로의 군사력 진출을 의미하는 집단적 자위권을 천명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정화 대원정을 폐기한 명 때와는 달리 중국은 선택지가 없다. 집단적 자위권을 추진하는 일본과 제2의 정화 대원정에 나서야 하는 중국 사이에 한반도는 끼여 있다. 세월호를 삼킨 동아시아 바다의 높은 파고는 우리에게 또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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