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아일랜드 총선에 참여한 좌파 민족주의 정당인 신페인당의 메리 루 맥도널드 대표(앞줄 가운데)가 출마한 더블린 중앙 선거구에서 1위로 당선이 확정되자 환호하는 지지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신페인당은 이날 총선에서 24.5% 득표로 창당 이래 첫 제1당 지위를 차지했다. 더블린/AFP 연합뉴스
지난 8일 치러진 아일랜드 총선에서 좌파 민족주의 정당인 신페인당이 중도 우파 성향의 양대 정당을 물리치고 1905년 창당 이래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개표가 진행되면서 선거 결과의 전체 윤곽이 나온 9일, 신페인당은 1순위 선호 투표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24.5%를 득표해 이번 총선의 최대 승자가 됐다. 제1야당 공화당이 득표율 22.2%로 뒤를 이었고, 집권 통일아일랜드당은 20.9%로 3위에 머물렀다. 신페인당과 녹색당을 뺀 거의 모든 정당의 득표율이 지난 총선보다 하락했다.
아일랜드 공영 라디오방송 <아르티이>(RTE) 뉴스의 개표 속보를 보면, 하원 전체 의석 160석 중 1차 선호도로 뽑는 39석을 포함해 모두 78석의 의석이 확정된 10일 새벽(현지시각) 신페인당이 29석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공화당(16석)과 통일아일랜드당(14석), 녹색당(5석)이 뒤를 쫓고 있다.
신페인당의 메리 루 맥도널드 대표는 총선 승리가 확인된 10일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혁명이 일어났다. 더는 양당 시스템으론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지 일간 <아이리시 타임스>는 10일 “(이번 총선에서) 신페인당 후보들은 잇달아 승리를 거머쥐며 아일랜드의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으며, 당 지도부는 집권을 위한 연정 구성 방책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맥도널드 대표는 “나는 누구와도 대화하고 귀를 기울이겠다고 말해왔다. 그게 어른이 하는 일이며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이라며, 좌파 성향의 다른 정당들과 접촉해 연정 구성 가능성을 타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1당으로서 집권 연립정부 구성을 주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2020 아일랜드 총선 1차 선호도 득표율(왼쪽) 및 2016년 총선 대비 득표율 득실 현황. FG=통일아일랜드당, FF=공화당, SF=신페인당, LAB=노동당, GP=녹색당. 출처=아일랜드 공영 라디오
신페인당은 아일랜드공화국과 영국 북아일랜드에서 활동하는 좌파 민족주의 정당이다. 북아일랜드 내전 당시 영국군 철수 및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의 통일을 지향하며 격렬한 무장투쟁을 벌였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정치조직이 뿌리다. 이 때문에 그동안 아일랜드의 온건파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소수정당으로 머물러왔다. 1987년, 1989년, 1992년 총선 득표율은 고작 1%대에 그쳤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독립투쟁 영웅인 게리 애덤스 전 신페인당 대표가 1998년 4월 영국 총리와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구성을 뼈대로 한 평화협정을 맺는 등 수십년간의 무력분쟁 종식에 앞장서면서 과격 테러단체 이미지를 지우고 대중정당으로의 변신에 노력해왔다. 1997년 총선에선 2.6%를 얻으면서 처음으로 하원의원을 배출했다. 2000년대 들어선 6~13%대까지 득표율을 크게 높이며 존재감을 키워왔으나, 양대 정당인 통일아일랜드당과 공화당의 사이에서 ‘만년 3당’으로만 있다가 이번 총선 승리로 사상 첫 집권당을 꿈꾸게 됐다. <아이리시 타임스>는 신페인당이 한때는 아일랜드공화국군과 분리할 수 없는 당으로서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약속에 젊은 유권자들이 마음을 열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신페인당의 집권 연정 구성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집권 통일아일랜드당 대표인 리오 버라드커 총리는 신페인당과의 연정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고수하며 “새 정부 구성 가능성에 대해 다른 정당들과 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1야당인 공화당은 신페인당의 연정 참여를 두고 당내에 찬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전체 의석 160석의 과반을 확보하는 연정 구성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신페인당이 연정 구성에 끝내 실패할 경우 총선을 다시 치를 가능성도 있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영국 정부군이 피의 보복을 되풀이한 북아일랜드 내전을 다룬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년)의 한 장면.
좌파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신페인당이 집권할 경우 영국의 집권 보수당 정부와의 관계뿐 아니라, 브렉시트 협상의 최대 걸림돌 중 하나였던 영국령 북아일랜드와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생길 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총선을 앞둔 지난 3일 영국의 여론조사업체 패널베이스가 아일랜드 유권자 1019명을 표본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아일랜드 국민 10명 중 8명은 “(특정 기간 안에) 영국의 북아일랜드 지역과 통일을 원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특히 응답자의 40%가량이 “10년 이내”의 조속한 시기에 통일을 원했으며, 19%는 “20년 이내”, 12%는 “30년 이내”를 희망했다.
한편, 아일랜드 총선은 ‘이양식 투표제(STV·single transferable vote)’라는 독특한 형태의 비례대표 선거로 치러진다. 각 유권자가 가장 선호하는 후보부터 차례로 순서를 매겨 투표하는 방식이다. 유권자 선호 1위 후보가 당선 기준 이상의 득표를 하거나, 아예 탈락할 경우 이 유권자의 표는 같은 방식으로 차순위 후보들에게 차례로 이전된다. 한 선거구에서 2인 이상을 선출하는 중·대선거구 제도에서 유권자의 표심을 최대한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한 장치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