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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가 ‘복지병’ 때문에 무너졌다고요?

등록 2015-07-03 19:08수정 2015-07-03 22:25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수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출근해서 조간신문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스마트폰 벨이 울렸습니다. “옥상! 콜?”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였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천천히 입을 뗀다 싶던 순간. “그…리…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청탁을 피했더니 급기야 ‘토요판에 대한 애정’ 운운하며 몰아붙이더군요. 초대 토요판팀 팀장이 야속하게 이럴 수 있냐구, 말이죠. 결국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토요판 지면엔 꽤 오랜만에 등장합니다. 2012년 초 <한겨레> 토요판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토요판팀 팀장을 맡았습니다. 창간호 표지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음악가 고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씨 통영 집을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네요. 한동안 ‘다음주의 질문’ 코너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사이 <한겨레21> 편집장을 거쳐 지금은 <한겨레> 경제담당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국민투표일(5일)이 정말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투표시간까지는 어림잡아도 이제 채 48시간이 남지 않았네요. 막판에 이르니 대부분의 선거전 종반께 보이는 양상이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그리스 사태는 애초부터 ‘경제 문제’라기보다는 ‘정치 문제’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느낌입니다.

우선 채권단과 그리스 정부의 막판 선전전이 팽팽합니다. 조금도 밀리지 않겠다는 각오가 엿보이죠. 그런 가운데서도, 상대방을 향해 능숙하게 ‘카드’를 던지는 일을 빼놓지 않습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연금 삭감, 부가가치세제 개편, 국방비 감축 등 채권단의 구제금융안에 담긴 내용의 상당 폭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채권단 역시 슬쩍 당근을 제시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일 공개한 보고서에서 그리스 금융안정을 위해선 앞으로 3년간 600억유로의 추가 자금 지원과 부채 탕감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긴축 일변도의 구제금융안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던 터라 일종의 반성문으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그리스 국민들이 구제금융안에 찬성하도록 한번 더 부드럽게 정치적 제스처를 취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최초의 선진국 국가부도’ 따위의 제목을 단 기사들을 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미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우리 역시 외환위기와 국가부도라는 호환을 한차례 겪은 처지니까요. 한편으론 채권단이 강요하는 긴축프로그램에 그리스 정부가 저항하는 모습에서 내심 쾌감을 느끼는 분들도 많더군요. 10여년 전 맥없이 모든 빗장을 풀었다가 워낙 혹독한 대가를 치렀던 우리의 아픈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리스와 우리 상황을 무턱대고 단순 비교하긴 힘듭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였고, 혹독한 긴축에 나섰음에도 때마침 불어닥친 세계경제 호황 덕을 톡톡히 누렸습니다. 변변한 수출산업 기반이 없고, 하필 세계경제가 죽을 쑤고 있는 와중에 위기에 빠진 그리스는 다르죠. 무엇보다 그리스는 유로존 단일통화에 묶인 터라 환율 특수조차 기대하기 힘듭니다. 외환위기 당시 우리 돈 가치는 곤두박질쳤지만, 역설적이게도 치솟은 환율 덕에 수출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죠.

한쪽에서는 그리스 사태의 근본 원인을 과도한 복지에서 찾으면서, ‘공짜 좋아하다간 한국도 또 당한다’는 주장을 열심히 펴기도 합니다. 그리스가 복지병 때문에 무너졌다는 주장은 다분히 왜곡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스의 재정적자가 심각한 건 맞습니다. 다만 재정적자는 과도한 복지지출 때문이라기보다는 상류층의 만성적인 탈세와 조세체계 부실에 따른 세수 부족에서 찾는 게 온당합니다. 그리스의 1인당 국민소득 대비 정부 복지지출 비중은 유로존 국가 가운데 높은 수준은 아닙니다. 채권단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향해 으레 게으르고 공짜만 좋아한다는 낙인을 찍곤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군요.

최우성 논설위원
최우성 논설위원
국민투표 결과를 섣불리 예단하긴 힘듭니다. 설령 그리스 국민들이 구제금융안에 노(No) 하더라도, 그리스의 지정학적·안보적 가치에 비춰볼 때 유럽연합이나 국제사회가 섣불리 그리스를 내치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리스 사태는 유로체제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정작 위기에 빠진 건 유로체제죠. 머지않아 그리스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겠죠. 하지만 유로체제의 한계는 앞으로도 잊어버릴 만하면 계속해서 수면 위로 떠오를 겁니다. 아마도 ‘그리스 악재에도 금융시장은 무덤덤’ 따위의 기사들은 절반만 진실일 겁니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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