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남중국해 주도권 싸움이 치열한 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4월 하이난성 싼야의 해군 기지에서 열린 신형 함정 3척의 취역식에 참석하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무인도였던 팍아사섬이 역사책에 등장한 것은 1933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군대가 이곳에 깃발을 꽂으면서다. 태평양 전쟁 땐 일본군이 점령했고, 그 후로 항상 남중국해 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남베트남, 필리핀, 대만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해왔고, 1971년부터 필리핀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러니 이 섬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의 원흉은 다름 아닌 제국주의다. 이는 곧 남중국해의 역사이기도 하다.
팍아사섬만이 아니다. 작은 무인도들에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의 그늘이 지자 1935년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중국남해도서도>를 발행하고, 1947년에는 이 지도에 근거해 가상의 선 11개를 연결해 ‘11단선’을 선포한 뒤 시사·난사·둥사군도에 병력을 주둔시킨다.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난 후, 중화인민공화국 저우언라이 총리는 여기서 베트남만 제외한 ‘9단선’을 선포하였고, 이 선 안의 드넓은 바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남중국해 분쟁이 이토록 첨예한 이유는 이곳이 차지하는 정치적·경제적 요인 때문이다. 남중국해는 약 14조세제곱미터(㎥)의 천연가스와 160억~330억배럴의 석유가 매장돼 있고, 세계 무역량의 30%가 지나가는 길목이며, 미국·중국 양국의 군사적 역량이 집중돼 있다. 또 중국의 유일한 바닷길이라는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다.
지난 한달 미·중은 동아시아에서 열띤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8월 말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은 싱가포르와 베트남을 잇달아 방문했는데, 목적은 ‘중국 견제’였다. 해리스 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주장과 행동들은 규칙에 근거한 질서를 훼손하고 타국의 주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도 9월 중순 6일간 베트남, 싱가포르, 캄보디아, 한국을 방문했다. ‘미국과 거리를 두라’는 노골적 주문을 전하고, 백신이라는 당근을 건넸지만, 기대만큼의 성과가 없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9월8일 미국의 미사일 구축함이 남중국해에 진입해 중국이 설치한 인공섬 인근을 통과하자, 이튿날 중국군은 ‘주권 침해’라고 비난하며 통킹만 해역에서 실탄 훈련을 실시했다. 9월15일,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 핵잠수함 기술을 전파하기로 하자, 다음날 중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회의에서 “이번 조치는 적나라한 핵 확산 행위”라며 비난했다. 중국 정부는 무리한 영유권 주장을 근거 삼아 역내 군사적 긴장도를 높이고 있고,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오랫동안 전략적 모호성을 기조로 남중국해 문제를 관망해온 태세를 적극적이고 선명한 기조로 바꾸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 의회는 영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캐나다가 참여하는 정보기관 동맹체 ‘파이브 아이스’에 한국·일본·인도를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유관 국가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하면, 다른 동아시아·태평양의 중간 국가들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모습이다. 가령 뉴질랜드는 ‘파이브 아이스’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반중 노선과 거리를 두고 있고, 그렇다고 친중도 아니다.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흐름은 멀리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내세운다. 이는 1980년대 중반 당시 뉴질랜드 노동당 정부가 핵무기 탑재 선박의 영해 통과를 불허함으로써 파이브 아이스와 소원해진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중국해 분쟁의 직접적 당사자인 베트남 역시 양국 사이의 줄타기를 영리하게 유지하는 외교술을 구사하고 있다. 1980년대 사회개혁 정책인 ‘도이머이’ 이래 베트남은 남중국해 갈등 문제를 강하게 부각시키지 않으면서, 원칙적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내에서 ‘남중국해 행위준칙’을 합의해 중국을 아세안과의 협의 틀로 이끌면서도, 도발에 대해선 일관된 입장을 견지한다. 9월23일 중국군이 자신들이 축조한 인공섬 활주로에 군용기를 착륙시키자, 베트남 외교부 대변인은 “베트남의 주권을 존중”할 것과 “유사한 활동을 즉시 중단하고 반복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다음날 시진핑 주석은 응우옌푸쫑 베트남공산당 서기장과 통화하여 “중·베 양국은 운명공동체”라며 달래기에 나섰다. 이처럼 중간국 외교는 국제관계에서 촉매와 촉진, 관리의 역할을 지향한다. 그러려면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세에서 나름의 원칙을 토대로 적극적인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구상하고, 협력적이고 연합적인 활동을 펼쳐야 한다. 권력 자원이 부족한 중간국가들에 연합은 국제법상 제도를 구축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보수언론들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파이브 아이스 동참을 선언해야 한다고 닦달이다. 고답적이고 단편적인 시야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미국의 대중 봉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것은 분쟁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분쟁 속에 뛰어드는 꼴을 낳을 뿐이다. 중국의 무리한 주장에 대해서는 국제법에 근거하여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원칙을 견지하되, 극단적 평행선을 달리는 양국 중 한쪽에 베팅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협력해야 할 대상은 뉴질랜드와 베트남과 같은 중간 국가들이다. 셔틀외교나 대안적 테이블을 통해 어느 한쪽에 휘말리지 않고, 평화 정세를 원하는 국가들과 관계를 다지고, 긴장 완화를 위한 적극적 중재자로 나서야 한다.
남중국해 분쟁은 한반도 평화와도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군비 확장이 아니라, 평화와 공존이라는 원칙을 지렛대 삼아 적극적으로 입장을 개진하고 연합을 구축해야, 한반도 문제에 대한 운신의 폭도 넓힐 수 있다.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해서라도 한반도에 갇히지 않는 시야가 필요하다.
과정을 누락한 채 좋은 말만 반복하는 게 ‘균형외교’라 착각하는 것도 문제다. 아태지역 전문가 제프리 로버트슨은 한국의 대외정책 형성 과정이 위계적이라는 것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아이디어가 단순히 톱다운 방식으로 시행되고, 위험 회피 경향만 높으니 이니셔티브가 발휘되지 않는다는 거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남중국해의 첨예한 긴장은 ‘바다 건너 불구경’이 될 수 없다. 이 지역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동아시아 전역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고, 일본 재무장의 구실이 된다. 남중국해에서 군사적 긴장이 강화되면, 한반도 문제 해결도 요원해진다.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중간국 외교와 더불어, 민간 차원의 국경을 넘어선 연대가 시급하다. 결국 전쟁 위기가 가중되고 대량살상 무기가 늘어나면, 각국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추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