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안후이성 툰시의 한 음식점 입구에 중국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을 뜻하는 부강, 민주, 문명, 화해 등의 글자가 적힌 전광판이 불을 밝히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https://bit.ly/319DiiE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인가? 언론이나 100만 유튜버 모두 버릇처럼 “사회주의”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상하이와 선전의 주식시장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 펀드매니저도 알고, 저렴한 인건비를 위해 공장을 지은 자본가도 알고, 몸으로 사회 생리를 체득한 2억9천만명의 농민공들도 그곳이 자본주의라는 걸 안다. 결국 중국은 ‘공산당’이 통치하는, 자본주의 대국인 셈인데, 이런 수식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는 중국인들도 잘 알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국을 떼어놓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제조업 강국이고, 애플이나 혼다 같은 세계적 브랜드의 하청 공장이 있다. 또 세계 최대의 외환보유국일 뿐만 아니라 달러 패권에 도전 중이다. 중국에서 화폐 없는 일상이란 불가능하며, 생활 전반은 시장화되어 있다. 무엇보다 엄청난 빈부격차와 수천만명의 부자들이 존재한다. 자본가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 시작한 지도 20년이나 지났다. 지난해 중국 정부가 디디추싱이나 알리바바 같은 아이티(IT) 기업에 규제의 칼날을 휘두른 것은 마오쩌둥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모순이 극심해져 당·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를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마치 미국 바이든 행정부에서 페이스북이나 애플의 독점 행위를 통제하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오인은 외연에서 비롯된다. 일단 중국 어디를 가든 길거리에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강조하는 선전 문구를 쉽게 목격할 수 있다. 2012년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공식화한 열두가지 가치를 말하는데, 자유, 공정, 법치, 평등, 민주 같은 온갖 좋은 말들을 모아놓았다. 그러다 보니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도 거리가 멀어져 그저 통속적인 도덕관념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몇년 전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한국인 기업가는 점증하는 임금인상 요구나 장시간 노동에 대한 불만을 통제할 요령을 찾아야 했는데,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이 꽤 유용했다고 한다. 직원들에게 “학업이나 일에 전심전력하다”라는 뜻을 가진 ‘경업’(敬業 )을 언급하며, 정부가 강조하는 가치인 만큼 불만 품지 말고 일에 전념하라고 하면 곧잘 순종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차용한 자본주의적 착취 사례인 셈이다.
사회주의 핵심가치관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게 바로 ‘문명’이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3년 집권 이후 자신의 문명관을 일관되게 피력해왔다. ‘중국몽’과 ‘일대일로’를 천명할 때 저변에 깔린 논리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경제·정치·문화·사회·생태문명”을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2019년에는 50여개 아시아 국가 정상을 초대해 ‘아시아문명대화대회’를 열어 자신의 문명관을 설파하기도 했다. 중국공산당에 있어 ‘문명’이라는 개념은 21세기 중화주의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명’ 규정은 동양 고전에 적힌 의미와 매우 다르다. 아편전쟁 패배 후 서구 열강이 물밀듯 들이닥치자 한족 지식 청년들은 ‘망국론’에 잠식되었다. 위기감은 팽창주의나 적자생존, 문명 대 야만 등 개념을 포괄하는 서구식 제국주의에 대한 매혹으로 이어졌다. 서구처럼 문명을 건설하고 강국이 되려면, 한족과 다른 소수민족을 하나로 묶는 중화민족 개념이 필요했고, 적자생존이나 문명-야만의 대립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때 전통적인 ‘화이론’이 근대적 민족주의와 결합됐다. 문명중심주의와 자민족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자기 문명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화이론’은 외부의 침입으로 한족 왕조의 위기가 발생하거나, 내부의 치명적 위기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마다 대두됐다. 그러니 오늘날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말이 이토록 빈번하게 들리는 이유도 지배 체제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모순 속에서 위협받는 정통성을 재확립하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중국 정부에 ‘문명’ 개념은 통치안정성, 애국과 동일한 의미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범죄 집단이나 사이비 종교로 지목된 사람들에게 여지없이 ‘악이 있으면 제거해야 혼란을 다스릴 수 있다’(有黑掃黑, 無惡治亂)는 구호가 골목길부터 공장 앞까지 즐비하다. 그리고 이는 곧바로 ‘문명’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농민공이나 철거민 등 사회적 모순에 직면한 집단이 떠들썩한 시위를 벌이거나, 통치 체제에 불만을 제기하면 하나같이 ‘비문명’으로 규정하고 “사회질서혼란죄”를 적용해 체포한다. 2015년까지 성장하던 연안 지역의 노동자 운동이 강도 높은 탄압으로 드물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3월28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장애인들의 이동권 요구 시위에 대해 “비문명적인 관점으로 불법 시위를 지속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을 보면 오늘의 중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고위 정치인이나 경찰들이, 생존을 건 요구를 들고 거리에 나선 노동자나 도시 빈민, 활동가들에게 공염불 외듯 하는 말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득세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은 기존의 정치 언어와는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사회를 크게 세 개의 집단으로 나누는데, 피를 빨아먹는 엘리트들, 선량한 시민들, 기생하는 하층집단이 그것이다. 가령 도널드 트럼프는 월가의 엘리트들만이 아니라, 이민자나 유색인종, 성소수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이들 하층집단에 의해 피해를 받고 있다고 선동하며 표를 얻었다. 시진핑 역시 인민을 둘로 분리해 억압에 맞서 저항하는 이들을 “비문명”, “흑악세력”(黑惡勢力)으로 규정해 라오바이싱(老百姓·일반인)과 분리시킨다. 민중의 단결은 통치를 위태롭게 하니, 민중 내 분열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준석의 언어는 트럼피즘이나 시진핑의 그것을 애매하게 결합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얼마 전 요양원에 계신 외할머니를 뵙고, 더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언제나 농담할 여유를 잃지 않았던 할머니는 이제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장애인이 됐다. 이 세상의 모든 비장애인은 누구나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갖고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이준석이 “비문명적”이라 규정했던 장애인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투쟁은 우리의 잠재적 이동권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출근길은 고통스럽지만, 트럼프나 시진핑, 이준석 같은 이들에게 속고 싶진 않다.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