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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마약 전쟁의 핫스팟” 도시빈민은 왜 독재자를 용인했을까

등록 2022-05-28 04:59수정 2022-05-28 13:28

[한겨레S] 홍명교의 이상동몽
가짜뉴스와 필리핀 정치

식민 여파로 민주주의 토대 허약
최근 독재자의 아들 대통령 당선
‘피플 파워’ 뒤 변화없는 데 불만
촛불 기대 배반한 한국과 오버랩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 당선자(가운데)가 25일 필리핀 케손시티 하원에서 양팔을 들어올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 당선자(가운데)가 25일 필리핀 케손시티 하원에서 양팔을 들어올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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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토착 지배계급은 수백년간 이어져온 식민통치의 산물이다. 스페인 식민통치 333년간 필리핀은 수십척 스페인 배를 앞세운 갈레온 무역에 의해 종주국과 가늘게 연결되어 있었다. 스페인 식민지 경영의 중심은 아메리카 대륙이었기 때문에, 서태평양의 군도까지 관심과 역량을 쏟을 여지가 없었다. 필리핀에 거주하던 스페인 통치자들은 단기적인 무역 독점에 열중했을 뿐, 여타의 식민통치엔 무관심했다. 이 공백을 필리핀의 토착 가문이 차지했다. 플랜테이션을 기반으로 한 엘리트 가문들은 1946년 탈식민지화 이후 명실상부한 과두지배 집단으로 등장했다.

경제구조는 식민 시절 그대로

독립 이후 필리핀은 서구의 정치제도를 모방했다. 이른 시기에 형식적 다당제나 의회제도 같은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한데 경제구조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개발도상국가들이 서구 선진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따라 하는데도 한계에 봉착하는 이유는 서구처럼 원시축적이 가능한 제3세계 출하지가 없고, 국내 경제구조가 지주계급들에 의해 준식민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들은 공업화를 위한 여러 시도를 펼쳤지만, 엘리트 가문들의 저항으로 내내 실패했다.

1986년 시민들은 20여년에 걸친 페르디난도 마르코스의 독재를 끌어내린 바 있다. ‘피플 파워’라 불리는 이 봉기는 학생들의 반독재 운동과 공산 반군, 마르코스 정권으로부터 이탈한 군부 일각 등 다양한 세력들이 일시적으로 연합해 이뤄졌다. 하지만 이후 정권들은 다른 과두엘리트 세력의 도전을 우려해 지주계급과 계속 타협해야 했고, 토지개혁과 경제구조 변화, 양극화 개선에 모두 실패했다. 2016년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당선이나 최근 독재자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의 압도적 승리는 필리핀의 민주주의 토대가 얼마나 취약한지 방증한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언론자유를 짓밟고, 사회운동가들을 학살하거나 위협했으며, ‘마약과의 전쟁’이란 명목으로 수많은 국민을 죽였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이때 사망자가 최소 6천명 이상, 필리핀 사회학자 월든 벨로는 2만7천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테르테의 주요 지지집단은 메트로 마닐라의 도시빈민 400만명이었다. 이들은 고철과 상자를 이어붙여 만든 거대한 빈민촌에서 하루 벌어 살아간다. 오랫동안 ‘무단점거자들의 구역’으로 불려온 슬럼 지역은 두테르테식으로 “마약 전쟁의 핫스팟”이다. 지난 6년, 이들의 이웃과 친지 수천명이 ‘마약과의 전쟁’에서 즉결 처형됐지만, 그들은 여전히 두테르테를 지지한다. 빈민촌에 사는 한 시민은 정치학자 클리브 아르게예스와의 인터뷰에서 “(두테르테 정권 시기에야) 우리는 정부가 쫓아내려는 집단이 아닌 존재가 됐다”고 말한다. 1992년 이래 정부가 판자촌 빈민을 불법화하고 강제퇴거시키려 했던 역사를 떠올린 것이다. “두테르테는 단지 부자 동네처럼 우리 지역을 깨끗하고 안전하게 만들고 싶어 했어요. 우리도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잖아요.” 도시빈민에 대한 강제퇴거로 점철된 한국의 과거와 오늘이 스쳐 지나간다.

도시빈민들은 왜 독재자를 용인하게 됐을까? ‘피플 파워’ 이후 집권 세력들 역시 지주계급 가문이거나 그 대변자에 불과했다. 이들은 독재자만 아니었을 뿐, 사회구조 개혁과 빈곤인구가 30퍼센트에 달하는 불평등에 대한 개선 의지가 없었다. 독재 시기 진상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역사 교과서에도 빈약하게 기록됐다. 도시빈민들이 “피플 파워 이후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런 정체 때문이다.

두테르테는 야당에 정권을 내주는 대신, 자기 사람을 내세웠다. 이렇게 해서 사라 두테르테와 마르코스 주니어 연합이 결성됐고, 글로리아 아로요 전 대통령 가문,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 가문도 추악한 동맹에 동참했다. 악명 높은 엘리트 가문들로 구성된 이들의 집권은 만연한 부패, 연쇄적인 권력 남용, 과잉 국가폭력으로 점철돼 있다. 두테르테 이후 권력에 굶주리던 지주계급 가문들이 나선 것이다.

이번 대선은 ‘역사해석’을 둘러싼 전쟁이었다. 봉봉 마르코스의 지지자들은 그가 강한 리더로서 경제를 다시 부흥시키고, 아버지가 집권한 “황금시대”처럼 만들 것이라 믿는다. 지난 1년간 이들은 페이스북 등 플랫폼에서 대량의 가짜뉴스를 쏟아냈다. 6년 전 두테르테가 페이스북을 통해 가짜뉴스 선동을 했다면 이번엔 보다 진일보한 형태로 반복됐다.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고, 페이스북·틱톡·유튜브에서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지지자들은 마르코스 독재 시기를 강력한 경제 성장과 인프라 프로젝트의 시대로 둔갑시켰고, ‘피플 파워’를 아키노 가문의 뇌물로 만든 것이라 주장했으며, 상대 후보 레니 로브레도에 대해선 “재임 기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빨갱이”로 낙인찍었다.

페이스북 광고를 통한 가짜뉴스 선동으로 도널드 트럼프를 당선시킨 사실이 알려져 전 세계를 뒤흔든 영국 데이터분석업체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의 전 직원 브리트니 카이저는 2020년 7월 필리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폭로한 바 있다. 봉봉 마르코스 일가가 회사 쪽에 가문의 리브랜딩을 의뢰했다는 것이다. 이 의뢰가 사업으로 이어졌다면 봉봉 마르코스는 2017년 말 전에 이미지 세탁을 위한 뉴스 조작을 시도했다는 말이 된다.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당선자(가운데)가 25일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 당선자(가운데)가 25일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필리핀의 현재와 한국의 오늘

과거 계엄령 독재의 아픔을 몸소 겪은 시민들과 인권단체, 학자들과 기자들은 ‘역사 세탁’ 공정이 일상상태가 되리라 우려하고 있다. 필리핀 언론 <래플러>의 수석편집자 차이 오필레냐는 이렇게 말한다. “두테르테 집권기 쟁점이 ‘인권’이었다면, 마르코스 집권기에는 ‘진실’일 것이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과 진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 중 누가 더 나쁜지 모르겠다.”

다당제와 선거제도가 존재하고, 부유한 기업가들이 존중받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필리핀의 모습은 민주주의가 텅 빈 기표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촛불 항쟁 이후 높은 기대로 당선됐지만, 촛불의 기대와 요구를 노골적으로 배반한 더불어민주당 정권의 추락이 지난 30년 필리핀 정치의 실패와 겹쳐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아무 의지를 보이지 않는 국회의원들이나 다주택자 종합부동산세 기준을 상향하겠다는 송영길 서울시장 후보를 보면 민주당의 추락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빈자리를 필리핀처럼 ‘탈진실’이 채울지, 새로운 대안정치가 채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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