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시민들이 지난해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사진과 샤하브3 지대지 미사일이 세워진 한 거리전시회 앞을 지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누가 대통령이 되든 탈퇴하지 않겠다고 보장하라.”
8월 초순 유럽연합(EU)으로부터 핵합의 최종 문안을 받은 이란 정부가 8월 하순에 미국 정부를 향해 공개적으로 요구한 내용이다.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으로 불리는 이란 핵합의는 2015년 미국 오바마 행정부 때 체결되었다가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탈퇴해 사문화된 바 있다. 이란의 요구는 두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이든 행정부가 보장하라는 것이다.
2015년 7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타결된 이란 핵합의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철저하게 평화적 목적으로 한정하고, 이에 상응해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게 뼈대였다.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물질은 두가지다. 하나는 고농축 우라늄이고 또 하나는 플루토늄이다. 핵합의의 목표는 이 두가지 핵물질에 강력하고 촘촘한 제한을 두는 데 맞춰졌다. 실제로 이 합의에 따라 이란의 우라늄 농축 능력에 상당한 제한이 부과되고, 플루토늄 생산 경로는 사실상 차단됨으로써 이란의 핵무기 개발 능력은 상당 기간 원천봉쇄되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 문제라며 이 합의에서 탈퇴했다. 기존 합의에 따르면, 이란은 2025년부터는 우라늄 농축 시설인 원심분리기에 가해진 제약에서, 2030년부터는 우라늄 농축에 부과된 제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도널드 트럼프가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나중엔 더 큰 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이란의 미래 핵 활동도 엄격한 검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란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을 추방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는 초강수를 두지 않는 한 핵무기 개발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핵합의에는 이란이 합의를 준수하지 않으면 제재를 다시 부과할 수 있다는 ‘스냅백’도 명시되어 있었다. 트럼프는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탈퇴해버린 것이다.
트럼프가 핵합의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자 이란은 우라늄 농축 수준을 크게 높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농축 수준이 높아질수록 핵무장의 문턱에도 다가서게 된다. 또다시 이란 핵 문제가 ‘발등의 불’이 된 것이다.
트럼프의 일방적인 탈퇴가 야기한 파장은 이란 핵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주요 산유국인 이란은 중동에서도 큰 영토와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이란은 세계 에너지 시장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지정학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핵합의에서 탈퇴해 강력한 제재를 부과하자 이란은 더더욱 중국과 러시아 쪽으로 기울어졌다. 중국과 러시아를 “전략적 경쟁자”로 간주한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 전개였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에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핵협정 탈퇴를 “대서양 관계에서는 심각한 위기를 자초하고 중국-이란, 러시아-이란 관계를 밀착시킨 무모한 행동”이라고 비판하면서 핵합의 복원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트럼프의 일방적인 탈퇴로 4년 동안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던 이란 핵합의가 되살아난다면 그 의의와 파장은 대단히 클 수밖에 없다. 우선 이 합의의 당사자는 미국과 이란에 국한되지 않는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주요국인 영국·프랑스·독일과 미국 및 나토와 치열한 전략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도 당사자로 참여하고 있다. 이란 핵합의가 부활되면, 오늘날 세계 질서에 있어서 갈등의 핵심축인 서방 진영과 중-러 준동맹이 모처럼 협력의 사례를 만들어내는 셈이 된다. 또 이란이 중국 및 러시아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방 진영과도 관계 개선을 이뤄내면 국제 무대에서 만만치 않은 행위자가 될 수도 있다.
핵합의 복원 시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극도의 혼란에 빠진 세계 에너지 시장에 미칠 영향도 주목된다. 이란은 트럼프가 핵합의에서 탈퇴하기 이전까지 세계 4위의 원유 생산국이었다. 또 핵합의가 복원되어 제재가 풀리면 즉각적으로 원유 수출에 나서기 위한 만반의 준비도 갖추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란이 수출 시장에 복귀하면 하루 100만~200만 배럴의 원유가 시장에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서방 진영의 대러시아 제재와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가 맞물리면서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유럽연합이 이란 핵합의 복원에 진력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란 핵합의가 부활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핵심적인 세부 쟁점들은 이란의 미래 핵 활동에 대한 통제 방안, 규제 대상에 이란의 탄도미사일 프로그램도 포함될 것인지의 여부, 이란 혁명수비대를 테러지원단체로 명시한 미국의 입장 변화 여부, 미국이 테러지원단체로 지정한 하마스와 헤즈볼라에 대한 이란의 지원 문제 등이다. 이들 쟁점과 관련해 유럽연합이 작성했고 미국과 이란도 검토해 유럽연합에 의견을 전달한 최종 문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갔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미국과 이란으로부터 의견서를 전달받은 유럽연합은 “합리적인 반응”이라며, 9월 초중순에 최종 타결이 이뤄질 수도 있다는 기대를 내비치고 있다.
최종 타결이 임박해질수록 장외 신경전도 치열해지는 것이 이란 핵합의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이란을 “실존적 위협”으로 규정하면서 공존을 거부해온 이스라엘 정부는 유럽연합의 최종 문안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다”며 미국을 상대로 전방위 로비를 펼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춘 이스라엘의 훼방전이 주요 변수로 떠오른다. 이란의 경쟁자로 핵합의에 줄곧 반대해온 사우디아라비아도 찬물을 끼얹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이란 핵합의가 되살아나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 생산을 줄일 수 있다”고 서방 진영을 압박하고 있다. 서방 진영이 기대하는 이란의 원유 수출 시장 복귀 효과를 석유수출국기구 감산을 통해 차단하겠다는 협박인 셈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이란의 요구대로 “더 강력한 보장 방안”을 찾을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일각에선 이란 핵합의의 법적 구속력을 높이기 위해 조약 형태의 합의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가 따른다. 하나는 조약은 미국 상원의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요하는데 공화당이 이에 동의해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천신만고 끝에 조약이 되더라도 향후 미국 행정부의 탈퇴 가능성을 원천봉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과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 조약은 각각 미국 공화당 정권인 닉슨 행정부와 레이건 행정부 때 체결되었다. 그런데 이들 조약에서 탈퇴한 당사자도 공화당 정권이었던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였다.
이란 핵합의의 부활 여부는 여전히 안갯속에 있지만, 이 합의를 되살려야 할 이유는 자명하다. 만약 이번에도 무산되면, 이란은 핵무장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수록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할 위험도 높아지게 된다. 미국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란은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국제 지정학과 에너지 시장에 미칠 파장도 커지게 된다. 무엇보다도 트럼프의 일방적인 탈퇴와 제재 부과로 고통을 받아온 이란 시민들의 피해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결단의 몫은 바이든 행정부에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도 바이든 행정부에 있다. 바이든은 대통령의 권한을 최대한 동원해, 타국과의 합의를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미국 예외주의’를 시정해야 한다. 이란 핵합의가 7자 간의 합의인 만큼, 합의문에 ‘4자 이상이 동의하지 않으면 탈퇴 선언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취지의 조항을 넣는 것도 유력하게 고려할 수 있는 대안이다.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를 전공했다. 조지워싱턴대 방문학자로 한-미 동맹과 북핵 문제를 연구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핵과 인간>,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등 다수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