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파운드화가 달러 대비로 1971년 이후 최저치로 떨어진 26일 런던 한 환전소 앞을 한 시민이 지나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달러 대비 사상 최저 수준으로 폭락했다. 달러 가치가 고공 행진하는 ‘킹달러’ 상황에서 영국 파운드화가 가장 먼저 통화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어른거리고 있다.
26일 외환 시장에서 미 달러 대비 영국 파운드화 환율은 한때 사상 최저 수준인 1파운드에 1.0327달러까지 급락했다. 1985년 2월26일의 1.05달러를 깬 것으로 1971년 이후 최저치이다. 파운드화는 이날 1.05달러로 약간 회복됐지만, 이틀간의 거래일 동안 무려 7%가 폭락했다. 이대로 가다간 곧 달러와 1대1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파운드화 폭락은 달러 강세 상황에서 영국이 금리 인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데다 최근 추가적인 감세안를 발표하면서 불이 붙었다.
콰시 콰텡 영국 재무장관은 23일 상류층을 겨냥한 450억파운드(약 68조8600억원) 규모의 감세안이 포함된 비공식적인 예산을 발표했다. 콰텡 장관은 25일 <비비시>(BBC)에 감세와 관련해 “할 것이 더 있다”고 말해, 추가감세를 예고했다. 리즈 트러스 총리 역시 당 대표 경선 때부터 대대적인 감세 공약을 내세워왔다.
이틀 연속 파운드화 투매 현상이 일어나자 영란은행은 26일 성명을 내어 “금리 변화에 주저하지 않겠다”고 진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11월 예정된 다음 회의 때까지 현재 큰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감세 정책에 대해 “완전한 평가”를 할 의도가 없다고 밝혔다. 그 여파로 파운드화는 추락을 이어갔다.
폴 도너번 유비에스(UBS)은행 수석경제분석가는 <가디언>에 투자자들은 부자감세를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영국 보수당을 “종말론 사이비교”라고 부르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애틀랜타 연방준비제도 의장인 라파엘 보스틱은 파운드화 투매는 영국 경제의 방향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지적했다.
영란은행은 정부가 추가감세안을 공개하기 전날인 22일 기준금리를 2.25%로 0.5%포인트 올렸다. 영국 경제는 이미 경기침체에 들어갔지만, 급등하는 물가 때문에 추가 금리인상을 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있다. 영국 경제는 올해 2분기에 국내총생산(GDP)이 0.1% 축소됐고, 3분기에도 0.1%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9.9%나 올랐다. 그나마 7월 10.1%에 견주면 오름세가 꺾인 것이다.
영국 파운드화는 1992년 조지 소로스 등이 이끄는 헤지펀드들의 투매 공격을 받아 급락한 바 있다. 이후 유럽통화제도(EMS) 중심기구인 '환율조절메커니즘(ERM)'에서 전격 탈퇴했다. 영국은 1976년 경제위기와 통화위기가 겹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금융을 받는 굴욕을 치른 적도 있다. 그 때문에 파운드화가 계속 추락하면, 영국이 다시 구제금융을 받을 위기에 놓일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