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3일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열린 아이누 원주민 정상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전통 기도 의식인 카무이노미에 참여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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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25일, 아이누족 권리 회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오가와 류키치가 86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35년 조선인 아버지와 아이누족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는데, 강제노동을 하던 부친은 전쟁이 끝나기 전 고향으로 돌아갔다. 젊은 시절 아이누족에 대한 멸시와 차별에 시달리던 그는 점차 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1995년부터 홋카이도아이누협회와 함께 아이누 코먼스 운동과 아이누족 유골 반환 소송을 주도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수십년간 일본의 국립대학들은 혈통 연구 명목으로 아이누족 무덤 수천개를 도굴했다. 고작해야 민족 간 유전학적인 지도를 그리는 게 전부였지만, 1930년을 전후로 한 이 작업은 당대 일본 지배층의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열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아이누족 활동가들과 피해 후손들은 도굴 작업을 자행한 대학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수십년에 걸친 소송 끝에 간신히 100여구의 유골을 반환받았다. 2018년, 오키나와 원주민인 류큐인들의 경우에도 교토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교토대학 내에는 여전히 수천구에 달하는 류큐·아이누·조선인을 비롯한 동아시아 피식민 민중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아이누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사람의 땅’이라 부르던 일본 북부 홋카이도·아키타현을 비롯해 러시아 사할린 등의 커다란 섬 곳곳에 독립적인 공동체를 일구며 살고 있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본토의 막부 지배계급에게 아이누 사람들은 경계 바깥의 낯선 이들로만 여겨졌다. 경제나 군사력의 측면에선 비교가 불가능했지만, 침략이 시작된 것은 메이지유신(1868년) 시기 일본 봉건사회가 근대 국민국가로 이행하면서다.
‘근대화된 문명인’을 자처하던 일본인들은 경계 바깥의 사회를 침략해 자신의 식민지로 삼고, 이를 ‘문명화’라고 포장하는 서양인들의 욕망을 적극 수용했다. 메이지유신 1년 만인 1869년, 일본 정부는 ‘사람들의 땅’(아이누모시르)을 ‘홋카이도’라고 명명했고, 1871년부터는 아이누족의 종교활동과 전통문화를 금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1899년 홋카이도 전역을 점령한 일본 정부는 ‘구 원주민 보호법’을 제정해 아이누족을 ‘외국인’이 아닌 ‘옛 원주민’으로 규정함으로써, 아이누족이 외국인도 국민국가 성원도 아님을 공식화했다. 20세기 초 내내 아이누 사람들의 강제이주가 이뤄지면서, 그들이 조상 대대로 살던 땅과 질서는 부정됐다. 일본인들은 아이누족에게 강제로 빚을 지게 하여 상환금 대신 땅을 영구임대 한다든지, 일본어를 읽을 수 없는 아이누인들을 술 취하게 만든 뒤, 막무가내식 토지 계약에 서명하게 하는 방식으로 쫓아냈다. 1886년 9월3일 현지의 <하코다테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적자생존 원리에 따르면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월한 종족은 성공하고 열등한 종족은 소멸한다. 요즘 아이누족 토착민의 경우에서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사 연구자 마크 피티는 이즈음 일본의 정책을 “정착 식민지 건설에 대한 실제 경험을 미리 제공한 사건”이라 평했다. 홋카이도를 점령해봤기에 조선, 대만, 필리핀, 미얀마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아이누족의 발언권은 제한됐다.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이나 경험은 20세기 내내 주목받지 못했다. 2017년 홋카이도 정부의 ‘아이누 생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이누 인구는 약 1만3천명으로 4년 전에 비해 4천명 줄었다. 이렇게 급감한 것은 이 조사가 홋카이도에 한정한 조사인데다, 아이누협회원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아이누족 정체성을 밝힐 경우 온갖 차별을 감당해야 한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일본 정부에 전국적인 실태조사를 권고한 바 있으나, 조사는 단 한번도 이뤄진 바 없다. 비공식 추정치 20만명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07년 유엔 총회에서 ‘원주민 권리선언’이 채택될 때, 일본 정부 역시 찬성표를 던졌다. 이제 더는 아이누족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어졌다. 이로 인해 2019년 4월 국제적인 압력 속에서 이뤄진 아이누정책추진법이 통과되면서 아이누족이 법에 의해 ‘원주민’으로 인정됐다. 식민지화 150년 만에 원주민으로서 사소한 권리를 존중받을 틀이 마련된 것이다. 법안 통과 후 참의원 국토교통위원회는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아이누 사람들이 고난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엄숙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 정치는 아이누족 불평등에 대한 실질적인 개선이나 역사적인 공유자산에 대한 인정과 거리가 멀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7월 일본 정부는 우포포이에 아이누민족박물관과 테마파크를 개관했는데, 아이누족 활동가들은 이곳을 공동체에 대한 모멸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착민들의 식민주의가 구축한 권력 구조를 영속화하고, 오히려 아이누인들을 관광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누족에겐 이 테마파크에 대한 의사결정권이 없으며, 도쿄올림픽 시기 관광수입 증대를 목적으로 건설됐다.
군부 쿠데타에 맞선 미얀마인이 출근과 등교를 거부하듯, 재일조선인이 세대에 걸쳐 저항하고 있듯, 아이누 사람들도 불복종 행동을 펼친다. 가령 1980년대 초반부터 추진됐던 니부타니댐 건설 사업에 대해 이곳에 살던 아이누족은 댐 건설의 절차적인 문제와 불법성, 환경 파괴, 원주민 차별 등을 부단하게 고발하고 투쟁했다. 8년에 걸친 소송 끝에 삿포로 지방법원은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아이누족 주민들에겐 그들의 문화를 향유할 권리가 있으며, 정부가 내세운 홍수 등은 과장된 위협이었다고 판결했다.
일본의 아이누족 말살과 상품화 정책을 그들만의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을까? 오늘날 중국 신장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수민족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대만 원주민들에 대한 한족 정권의 무시, 로힝야에 대한 버마족의 탄압은 이것이 꽤 익숙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증조할머니 때부터 살던 중국 땅에서도, 먹고살려고 찾아온 남한에서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조선족 이주민들의 현실도 마냥 먼 이야기는 아니다. 이들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면서 타국의 식민주의와 인종주의를 비난할 수 있을까? 갈수록 국경을 강화하는 국가권력에 순종하는 게 아니라, 경계에 선 사람들을 가시화하고 경계인 공동체의 민주주의를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