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플랫폼 ‘그랩’ 배달원이 지난 2020년 싱가포르 금융가의 한 건널목 앞에서 진행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EPA 연합뉴스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오늘날 동아시아 사람들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적대감을 높여가지만, 자본은 더 저렴한 인건비와 더 넓은 시장을 찾기 위해 국경을 넘나든다. 플랫폼 기업들도 그렇다. 모바일앱의 편의성이라는 포장을 덮고 있지만, 본질은 얼마나 빠르게 시장을 장악해 저렴한 노동력에 대한 착취를 확장하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을 제외한 동아시아 전역에서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것은 ‘딜리버리히어로’와 ‘그랩’ 두 기업이다. 푸드판다와 배달의민족을 소유하고 있는 딜리버리히어로는 유럽과 남미에서 위세가 높은 글로벌 음식배달 플랫폼 기업이다. 아시아 시장에서는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푸드판다란 브랜드를 통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한편, 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에선 그랩이 명실공히 시장 1위를 점하고 있다.
그랩은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40명의 택시기사들이 함께 설립했다. 해마다 인근 국가들로 진출하면서 현재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동남아 8개국 400여 도시에서 모빌리티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본래는 차량공유 중개앱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음식배달과 퀵서비스, 금융서비스 등 다양한 영역을 아우른다.
초기 그랩 비즈니스의 성패는 미국에서 온 우버와의 경쟁에 달려 있었다. 그랩은 중국의 디디추싱이 그랬듯, 현지화에 실패한 우버와의 경쟁에서 완벽하게 승리했다. 동남아시아 소비시장과 디지털화의 성장 여지가 여전히 한참 남아 있다고 본 자본시장의 견해가 2021년 12월 그랩의 미국 나스닥 상장을 이끌었다. 상장 당시 400억달러(약 49조원)의 가치를 보였는데, 동남아 기업으로선 사상 최고액이었다. 물론 이후 그랩의 주가는 쿠팡과 유사한 하락선을 그으며 3분의 1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사이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인 손정의(일본 이름 손마사요시) 같은 대주주는 잭팟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랩이 동남아 시장을 장악하면서 각국에서 오토바이로 먹고살던 수많은 노동자의 생계가 파괴됐다. 동남아의 전통적인 오토바이 운송시장에서 노동자들은 고객과의 흥정과 같은 방식으로 건당 수익을 보전해왔지만, 그랩의 등장으로 모든 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2010년대 후반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서 3륜택시를 운행하던 노동자들이 그랩과 정부에 맞서 연일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랩 노동자들조차 행복해지지 않았다. 2021년까지만 해도 그랩은 36억달러라는 엄청난 수준의 적자를 기록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랩은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던 수수료를 대폭 깎았다. 결국 이는 엄청난 비용을 절감시켜주었고, 임금은 대거 삭감됐다. 인도네시아 가자마다대학의 거버넌스 및 공공문제 연구소에서 라이더 29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20년 2월 이후 1년 만에 소득이 3분의 1 수준으로 하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도네시아의 플랫폼노동 연구자 아리프 노비안토가 추가 실시한 조사에서도, 2018년 46만루피아(3만8천원)였던 하루 평균 소득은 2020년 4월엔 8만5천루피아로 크게 하락했다.
2022년에 다소 회복됐지만 기업공개(IPO) 이후 그랩 노동자들의 임금 하락은 분명해 보인다. 수당이 줄면 쉴 새 없이 일해야 생계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에 교통사고 위험은 매우 높아진다. 상기한 조사에서 교통사고를 포함한 직업질환을 경험한 라이더는 전체의 73.85%에 이르렀다. 노동권이 이렇게 추락하게 된 원인엔 고용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특수고용에 있다. 그랩은 라이더들에게 최저임금이나 휴가, 안전장비와 같은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벤처캐피털을 통한 ‘현금 태우기’로 시장을 장악한 뒤에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임금은 낮고, 경쟁은 치열한 혹독한 현실만 남는 것이다.
결국 출구는 라이더들이 스스로 조직하는 것뿐이다. 앞서 언급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60%는 노동조합이나 그와 유사한 형태의 노동자조직에 가입되어 있다고 답했다. 사하밧 그랩 클럽이나 스리캇(세리카트) 오졸 인도네시아(‘세로자’) 등 조직들이 그것이다. 2020년 8월 120명에 불과했던 세로자의 조합원 수는 1년 만에 7500명을 넘어섰다. 플랫폼노동 연구자 아리프 노비안토는 라이더들의 조직화 흐름이 “와츠앱이나 페이스북 그룹에서 가시화되고 있고, 의식도 높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2021년 11월, 수라카르타에선 라이더 수백명이 플랫폼 기업 사무실로 몰려들어 사측이 최저 배송료를 15% 인하한 것에 항의했다. 노비안토의 조사에 따르면, 2020년 3월부터 2년 동안 71건의 플랫폼 노동자 시위가 발생했고, 대규모 시위와 파업, 사무실 점거 등이 벌어졌다.
2021년 가을 홍콩에서 발생한 푸드판다 라이더들의 파업도 온라인에서 스스로 조직화해 일어났으며, 이듬해 봄 미얀마 양곤에서 발생한 푸드판다 라이더 9천명의 파업도 이러한 조직 형태와 유사하다. 권위주의 통치에 의해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두 도시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풀뿌리 행동이 플랫폼 노동자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희망의 싹은 어딘가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음식배달 라이더는 고용이 유연하고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지난 12월27일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배달업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라이더 수는 2019년 상반기 11만9626명에서 2022년 상반기 23만7188명으로 크게 늘었다. 배달업 종사자 1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라이더의 43%는 최근 6개월간 교통사고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촉박한 배달 시간에 따른 무리한 운전’이 그 원인으로 지목됐다. 지난 1월27일 고용노동부는 ‘고용서비스 고도화 방안’에서 “고용서비스 산업 활성화를 위해 규제를 혁신하겠다”고 발표했다. 많은 규제 혁신 담론이 그렇듯, 여기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위험 요소가 숨겨져 있다. 배달의민족 같은 플랫폼을 ‘노무제공계약 체결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거나 계약 체결을 중개하는 전자적 장치 또는 체계’로 정의하겠다는 것인데, 플랫폼을 단순히 중개자로 보게 되면,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23만명의 라이더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산재나 노동시간, 교섭 등의 책임이 면제되기 때문이다. 자카르타와 양곤, 홍콩의 라이더들처럼 당장 오토바이 타고 고용노동부 앞으로 달려가야 하는 상황이다.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