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기술은 인류에게 ‘에너지’라는 선물과 ‘핵폭탄’이라는 재앙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과학자들의 핵 기술 개발은 과연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사진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장면. 자료사진
푸틴, 1940년대 미-소 핵무기 첩보전 공개
‘미국 독점하면 세계평화 위협’ 판단
‘미국 독점하면 세계평화 위협’ 판단
“냉전 시대 과학자들이 미국의 핵 비밀을 훔치는 데 성공해, 러시아가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오는 3월4일 세번째 대권을 움켜쥐기 위한 선거를 앞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지난 22일(현지시각) 군 사령관들을 만난 자리에서 평소 자신의 신념이었던 ‘세력 균형추로서 러시아’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날 그가 꺼내든 주제는 냉전 이후 미소 사이에 이어진 핵무기를 둘러싼 치열한 첩보전이었다. 이날 푸틴은 “미국이 (1945년 핵실험으로)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반면 소련은 개발 단계일 때 소련은 국외 정보망을 통해 중요한 정보들을 입수했다”면서 “당시 첩보요원은 미국의 핵기술 자료를 마이크로필름 형태가 아니라 여행 가방에 가득 담아왔다”는 설명을 덧붙였다고 러시아 국영 <이타르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그의 말은 무슨 뜻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이뤄진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사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1940년 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실험실. 시보그·케네디·왈루 등 세 명의 학자들은 우라늄의 원자핵에 입자 가속기로 고속의 중양자(보통의 수소원자핵의 2배 무게를 가진 수소핵)를 충돌시키는 실험을 되풀이했다. 한 순간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원소가 발견됐다. 시보그는 1941년 2월23일부터 이틀 동안 이뤄진 실험을 통해 이 새 원소를 최종 확인했다. 자연에 없던 원소가 인공적으로 합성된 이 순간, 과학의 역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뤘다. 원소의 이름은 ‘플루토늄’으로 결정됐다.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흐른 1945년 7월16일 미국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 앨라모고도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시행됐다. ‘패트맨’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플루토늄 원자탄은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들며 폭발했다. 실험은 성공이었다. 실험으로부터 채 한달이 지나지 않은 8월10일 또 다른 패트맨이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져 2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쟁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됐다. 당시 미국은 당분간 세계 어느 나라도 원폭 실험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독일, 일본, 소련 등 강대국들이 원자폭탄을 만드는 이론적인 원리에 대해선 이해하고 있었지만, 실제 이를 실용화하는 데는 만만치 않은 난제들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불러 모은 뒤 천문학적인 예산을 털어 넣는 ‘맨해튼 계획’이라는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진행해 가까스로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했다.
가장 큰 난제는 플루토늄에 충격을 줘 폭발을 유도하는 기폭 장치의 개발이었다. 미국의 천재 수학자였던 폴 노이만이 10개월에 걸친 계산 끝에 가까스로 플루토늄이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기폭 장치를 완성했다. 화약의 충격파가 플루토늄에 고르게 압박을 줄 수 있도록 폭탄을 내부와 외부에 2개 층으로 설치하고, 압력이 중심에 집중될 수 있도록 32조각의 렌즈를 설치한 매우 정교한 장치였다.
그러나 미국의 예상과 달리 소련은 미국의 핵 실험 성공으로부터 4년 뒤인 1949년에 원폭 실험에 성공한다. 미국이 애지중지 여겼던 극비 군사기밀인 ‘기폭장치’에 대한 정보가 빼돌려진 것이었다.
정보를 빼돌린 이는 테오도르 홀(1925~1999)이라는 당시 18살이던 천재 물리학자였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유대계 미국인이었던 그는 플루토늄의 제조법과 패트맨의 상세한 설계도를 소련에 넘겼다. 왜 그랬을까. 1999년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취재반이 당시 영국 런던에 머물고 있던 홀을 찾았을 떼 그는 건강 악화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없었다. 단, 그는 부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앨라모고도에서 원자 폭탄의 파괴력을 알게 된 순간 스스로에게 물었다. 미국이 원폭을 독점한다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에게는 신념이 있었다. 핵전쟁의 공포를 각국의 지도자들이 공유한다면 그들이 제정신을 차려 평화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 발언은 1999년 8월22일 <엔이이치케이 스페셜>을 통해 보도됐고, 홀은 그로부터 석 달 만에 숨졌다. 러시아 정보기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홀의 정보 유출은 소련 정보기관의 설득 때문이 아닌 개인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홀의 신념은 현실로 이어졌다. 냉전 시기 미소는 엄청난 군비 경쟁을 하며 앞다퉈 핵무기를 제조했지만 이를 실전에 사용하진 않았다. 한쪽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곧바로 보복 공격을 받게 돼 인류 전체가 멸망한다는 상호확증파괴, 즉 매드(MAD·Mutual Assured Destruction)에 의한 공포의 균형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미국을 제어하는 균형추 러시아’는 ‘푸틴 시대’에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주제였다. 이는 그가 최근 밝힌 러시아 국방 현대와 계획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미사일방어(MD) 시스템이라는 ‘방패’에 대응하기 위해 향후 10년 안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400기와 핵잠수함 8대, 잠수함 20대, 전투기 600대 이상을 확보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미국이 러시아의 핵무기를 방어할 방패인 미사일방어 시스템을 완성한다면 상호확증파괴라는 핵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그래선 안 된다.’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러시아의 역할에 대한 푸틴 나름의 철학이 담긴 계획인 셈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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