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수치
[토요판] 특집
랑군의 봄, 마지막 전사의 편지
랑군의 봄, 마지막 전사의 편지
▶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40여개국의 전선을 취재해온 정문태씨는 1989년부터 버마 반정부세력의 무장투쟁 현장을 지켜본 저널리스트다. 1995년과 1996년에는 버마 민주화운동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를 랑군 자택에서 두해에 걸쳐 단독인터뷰해 버마 외교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결국 1996년부터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으며, 이는 2012년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버마 정부가 여전히 말로만 언론자유를 보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랑군의 봄’은 다시 오는가. 지난 1일 치른 버마(공식 국호 미얀마) 보궐선거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의 국민민주연맹(NLD·민족민주동맹)이 압승했다. 아웅산 수치는 11일 테인 세인 대통령과도 비공식 회담을 했다. 미국은 20여년간 진행된 경제 제재를 풀 조짐이다. 버마 정부는 더 나아가 1988년 이후 국경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지도부를 곧 랑군(양곤)으로 초청해 평화회담을 할 예정이다. 이는 24년간 테러리스트로 취급했던 조직을 협상 주체로 인정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한겨레>가 현지 취재로 처음 밝혔다. 버마-타이 국경에서 평화회담을 준비하는 버마학생민주전선 지도부의 복잡한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군사정권이 1989년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었으나 여전히 민주세력을 비롯한 현지인들은 국호 개정의 불법성을 들어 버마를 고집하고 있다. 이를 존중해 기사에선 ‘버마’라고 표기했다. 정리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안티 수 안녕하십니까? 아직은 찾아뵙고 만날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이 편지를 드립니다. 저는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탄 케입니다. 고향을 떠나 국경 산악으로 온 지 어느덧 24년째 접어들지만, 우리는 그동안 변함없이 8888(1988년 8월8일) 민주항쟁을 함께 했던 안티 수(Aunty Suu·아웅산 수치의 애칭)에 대한 기억을 동력 삼아 반독재 민주투쟁 전선을 달려왔습니다. 최근 버마 안팎에서 랑군의 변화를 눈여겨보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안티 수에게 국경전선 현실을 올바르게 전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반독재 민주화라는 공동 목표를 지녀온 랑군과 국경 민주진영 사이에는 의사소통 문제가 있었고, 그 결과 서로 오해를 빚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안티 수가 버마학생민주전선을 비롯한 국경 민주혁명 세력들을 무시해온 까닭도 그런 소통부재에서 비롯된 일이라 믿어왔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껏 국경은 랑군에서 들려오는 ‘아웅산 수치의 결정’이라면 국경 정서와 맞지 않고 때론 국경 전략에 어긋나는 경우에도 늘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건 안티 수의 판단과 결정이 늘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진영이 적전 분열상을 보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국경 민주혁명전선에서는 안티 수를 두고 ‘가장 어려운 동지이자 가장 어려운 적’이라는 말까지 나돌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안티 수가 받아온 고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해서 우리는 그 ‘아웅산 수치의 결정’을 판단하기 전에 늘 안티 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전제를 원칙처럼 달아 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티 수의 역사와 현실 인식에 의문을 달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버마학생민주전선을 업신여겨온 안티 수의 시각은 반독재투쟁으로 이어져 온 우리 버마 현대 민중사를 스스로 얕잡는 중대한 모독임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우리 버마학생민주전선 동지들은 안티 수의 비폭력 평화노선을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1988년 안티 수와 함께 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외치며 비폭력 평화 시위를 이끌었던 바로 그 청년·학생들입니다. 그때 무장군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동료 4000여명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그 군인들에게 쫓겨 국경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애초 우리는 무장투쟁을 하고자 국경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인 국경 소수민족해방구에 닿은 우리들은 국경산악전선에서 총이 생존임을 깨달았습니다. 군사훈련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우리는 맨몸으로 전선에 내몰리며 소수민족 해방군들에게 의지를 시험당하기도 했고, 랑군에서 온 버마인이라며 스파이로 몰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비폭력 평화란 말로
국경 무장세력을 무시하지만
우리의 24년 투쟁이 있기에
당신이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선거참여로 정부에 면죄부 주고
현실정치에 뛰어든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합니다
내전종결·헌법개정 힘써주세요 정부군과 소수민족해방군 사이에서 이중 압박을 받으며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며 총을 든 우리는 시민을 학살한 독재 군인에 맞섰고 460여명에 이르는 동지들이 국경전선에서 산화했습니다. 또 500명 웃도는 동지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안티 수와 함께 민주화를 외쳤던 경험을 저마다 훈장처럼 자랑스레 가슴에 새겼던 그 동지들은 모든 명예와 부와 안락함을 버리고 오직 조국의 민주화를 택했던 우리 버마 현대사의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티 수가 말해온 그 비폭력과 평화란 단어가 우리들의 사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난 24년 동안 국경의 희생적인 민주투쟁과 달리 안티 수가 이끈 랑군의 국민민주연맹(NLD)은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 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안티 수가 외쳐온 그 비폭력 평화는 결과적으로 학살군인집단에 주는 면죄부 노릇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군인 독재자들이 안티 수를 정치적 상대로 여겼던 건 대중시위 한번 조직하지 못했던 국민민주연맹이 두려웠던 탓이 아니라 아웅산 수치를 유일 지도자로 내세운 국경 민족해방·민주혁명전선이 무장투쟁으로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안티 수는 국경을 무시했습니다. 안티 수의 정치적 동력이 과연 어디서 나왔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국경 무장투쟁의 역사성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국경 민주혁명 진영에선 “아웅산 수치가 민주주의를 말할 때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는 우리는 독재를 떠올린다”는 말이 나돕니다. 안티 수의 독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이번 4월1일 보궐선거였습니다. 국경은 2010년 총선을 보이콧한 안티 수의 결정을 강력하게 지원했습니다. 그건 군인들이 만든 2008년 헌법과 총선을 공히 불법으로 규정한 안티 수의 결정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안티 수는 느닷없이 이번 4월 보궐선거 참가를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또 어쩔 수 없이 안티 수의 결정을 지지했습니다. 국경 민주혁명 진영에서는 안티 수의 결정을 놓고 상당한 반발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국경에선 안티 수가 불법으로 규정했던 헌법과 선거에 안티 수 스스로 뛰어들면서 현 군인 주도 정부에 합법성을 안겨줘버린 사실을 놓고 배신감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국경의 정서를 대신해서 우리는 현실 정치 속으로 뛰어든 안티 수에게 마지막 제언을 드립니다. 카친주를 비롯한 버마 전역의 내전 상태 종결, 정부 내 독립적인 평화위원회 결성, 민간 차원의 포괄적인 민족대표회의 결성, 헌법 개정안 추진을 위해 애써 주십시오. 이 4개 의제를 풀어내지 못한다면 결코 안티 수와 우리들이 지난 24년 동안 함께 염원해 왔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안티 수가 더 큰 정치 지도자로 거듭나 영원히 우리들의 이모로, 시민들의 이모로 남아 있기를 바라며 이 편지를 마칩니다. 2012년 4월10일
버마-타이 국경 카렌민족해방군
6여단 해방구에서 탄 케 드림
버마민주학생전선 탄 케 의장 “정부쪽 평화회담 제안받고 놀라…장난은 아닐 것” 버마 중부 만달레이의 차욱세에서 태어난 탄 케(Than Khe)는 8888 민주항쟁 때 만달레이의과대학 5학년으로 시위에 참여한 뒤 군인들에게 쫓겨 이듬해 2월 인도 국경을 넘었다. 그 뒤 인도 국경과 버마 북부 카친독립군(KIA)에 진 친 버마학생민주전선을 오가며 야전 의료팀을 꾸렸고, 2001년 제6차 버마학생민주전선 대표회의에서 의장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탄 케는 카친 전선에서 만난 만달레이대학 출신 학생군 동지인 킨 슈웨 라잉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두고 있다. 4월7일, 타이-버마 국경을 가르는 카렌민족해방군 6여단 해방구엔 철 이른 폭우가 쏟아졌다. -요즘 국경에서 가장 큰 화두인 평화회담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1월10일 정부 쪽 평화협상 대표 둘 가운데 한 명인 아웅 타웅(현 집권여당 연방단결개발당 의원)한테 처음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2월9일 매솟에서 예비회담을 했다.” -근데, 4월8~10일로 잡았던 랑군회담은 왜 연기되었나?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아웅 타웅이 4월1일 보궐선거 지원에 나서면서 회담 준비할 시간이 쪼들렸던 것 같다. 해서, 4월 중순 송끄란 틴잔(버마 신년) 잔치 끝내고 말쯤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동안 정부는 버마학생민주전선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해 왔는데, 정부와 평화협상을 하려면 양쪽이 인정할 만한 학생군 성격이 먼저 나와야 하지 않나? “그래서 우리가 ‘학생민주무장단체’란 용어를 제의했고 그쪽이 받아들였다.” -그사이 정부 쪽 평화회담 로드맵과 학생군 의제가 충돌한 건 없나? “우리가 제의했던 회담대표 수를 그쪽이 좀 줄이자고 한 것 말고는 없다. 애초 충돌할 대목도 없었고. 정부 로드맵이란 게 1단계 휴전, 2단계 정치회담(각 소수민족해방세력과 개별적), 3단계 연방회담(모든 민족해방, 민주혁명 세력이 참여하는)처럼 상식적인데다 우리 학생군은 해방구 없이 각 소수민족 해방군에 분산 배치된 상태니까 2단계 없이 휴전하면 바로 3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이고, 합리적인 듯하다.” -가장 큰 성과는 정부가 버마학생민주전선을 협상 상대로 인정했다는 대목인데, 이건 학생군의 무장투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다는 뜻이겠지. “우리도 1월10일 정부 쪽 협상 제의 받고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예비회담 대표단을 끌고 갔던 묘 윈(Myo Win·부의장)은 뭐라든가? 정부 쪽 회담대표들한테서 진정성 같은 걸 느낄 수 있다고 하던가? “우리도 그 점을 가장 조심스레 탐색했는데, 현재까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우리만 상대하는 게 아니라 모든 소수민족해방세력과 민주세력을 아우르는 이른바 ‘평화건설 과정’ 일환이니 장난들 칠 것 같지는 않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날도 머잖았네? 근데 고향 가면 뭘 할 건가? 의과대학 복학한다는 것도 그렇고. “학교는 옛날 이야기고. 돌아가긴 가야지. 벌써 24년째다. 고향 가면 식당 차릴까 한다. 젊은 동지들 가운데 못 배운 이들에겐 일자리도 만들어 줘야 하는데, 식당 하면 밥이라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테니. 이문 나면 희생당한 이들도 보살필 수 있을 거고. 내겐 동지들 돌봐야 하는 게 미래혁명이고 미래정치다.” -돌아가면 버마학생민주전선을 정치조직으로 돌릴 생각인가? “무장조직은 해산하겠지만, 그렇다고 정치조직으로 가겠다는 건 아니다. 일상 속의 혁명 같은 걸 염두에 두는데, 이를테면 정치 감시투쟁 같은. 버마학생민주전선 깃발은 내리지 않겠다.” 오늘 버마 안팎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사람들은 섣불리 달라진 세상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 국경에서 테러리스트 오명까지 뒤집어쓴 채 그 민주화를 위해 무장투쟁을 벌여왔던 버마학생민주전선은 여전히 새로운 혁명을 꿈꾸고 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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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무장세력을 무시하지만
우리의 24년 투쟁이 있기에
당신이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선거참여로 정부에 면죄부 주고
현실정치에 뛰어든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합니다
내전종결·헌법개정 힘써주세요 정부군과 소수민족해방군 사이에서 이중 압박을 받으며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며 총을 든 우리는 시민을 학살한 독재 군인에 맞섰고 460여명에 이르는 동지들이 국경전선에서 산화했습니다. 또 500명 웃도는 동지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안티 수와 함께 민주화를 외쳤던 경험을 저마다 훈장처럼 자랑스레 가슴에 새겼던 그 동지들은 모든 명예와 부와 안락함을 버리고 오직 조국의 민주화를 택했던 우리 버마 현대사의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티 수가 말해온 그 비폭력과 평화란 단어가 우리들의 사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난 24년 동안 국경의 희생적인 민주투쟁과 달리 안티 수가 이끈 랑군의 국민민주연맹(NLD)은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 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안티 수가 외쳐온 그 비폭력 평화는 결과적으로 학살군인집단에 주는 면죄부 노릇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군인 독재자들이 안티 수를 정치적 상대로 여겼던 건 대중시위 한번 조직하지 못했던 국민민주연맹이 두려웠던 탓이 아니라 아웅산 수치를 유일 지도자로 내세운 국경 민족해방·민주혁명전선이 무장투쟁으로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안티 수는 국경을 무시했습니다. 안티 수의 정치적 동력이 과연 어디서 나왔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국경 무장투쟁의 역사성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버마학생민주전선 탄 케 의장.
버마민주학생전선 탄 케 의장 “정부쪽 평화회담 제안받고 놀라…장난은 아닐 것” 버마 중부 만달레이의 차욱세에서 태어난 탄 케(Than Khe)는 8888 민주항쟁 때 만달레이의과대학 5학년으로 시위에 참여한 뒤 군인들에게 쫓겨 이듬해 2월 인도 국경을 넘었다. 그 뒤 인도 국경과 버마 북부 카친독립군(KIA)에 진 친 버마학생민주전선을 오가며 야전 의료팀을 꾸렸고, 2001년 제6차 버마학생민주전선 대표회의에서 의장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탄 케는 카친 전선에서 만난 만달레이대학 출신 학생군 동지인 킨 슈웨 라잉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두고 있다. 4월7일, 타이-버마 국경을 가르는 카렌민족해방군 6여단 해방구엔 철 이른 폭우가 쏟아졌다. -요즘 국경에서 가장 큰 화두인 평화회담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1월10일 정부 쪽 평화협상 대표 둘 가운데 한 명인 아웅 타웅(현 집권여당 연방단결개발당 의원)한테 처음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2월9일 매솟에서 예비회담을 했다.” -근데, 4월8~10일로 잡았던 랑군회담은 왜 연기되었나?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아웅 타웅이 4월1일 보궐선거 지원에 나서면서 회담 준비할 시간이 쪼들렸던 것 같다. 해서, 4월 중순 송끄란 틴잔(버마 신년) 잔치 끝내고 말쯤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동안 정부는 버마학생민주전선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해 왔는데, 정부와 평화협상을 하려면 양쪽이 인정할 만한 학생군 성격이 먼저 나와야 하지 않나? “그래서 우리가 ‘학생민주무장단체’란 용어를 제의했고 그쪽이 받아들였다.” -그사이 정부 쪽 평화회담 로드맵과 학생군 의제가 충돌한 건 없나? “우리가 제의했던 회담대표 수를 그쪽이 좀 줄이자고 한 것 말고는 없다. 애초 충돌할 대목도 없었고. 정부 로드맵이란 게 1단계 휴전, 2단계 정치회담(각 소수민족해방세력과 개별적), 3단계 연방회담(모든 민족해방, 민주혁명 세력이 참여하는)처럼 상식적인데다 우리 학생군은 해방구 없이 각 소수민족 해방군에 분산 배치된 상태니까 2단계 없이 휴전하면 바로 3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이고, 합리적인 듯하다.” -가장 큰 성과는 정부가 버마학생민주전선을 협상 상대로 인정했다는 대목인데, 이건 학생군의 무장투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다는 뜻이겠지. “우리도 1월10일 정부 쪽 협상 제의 받고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예비회담 대표단을 끌고 갔던 묘 윈(Myo Win·부의장)은 뭐라든가? 정부 쪽 회담대표들한테서 진정성 같은 걸 느낄 수 있다고 하던가? “우리도 그 점을 가장 조심스레 탐색했는데, 현재까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우리만 상대하는 게 아니라 모든 소수민족해방세력과 민주세력을 아우르는 이른바 ‘평화건설 과정’ 일환이니 장난들 칠 것 같지는 않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날도 머잖았네? 근데 고향 가면 뭘 할 건가? 의과대학 복학한다는 것도 그렇고. “학교는 옛날 이야기고. 돌아가긴 가야지. 벌써 24년째다. 고향 가면 식당 차릴까 한다. 젊은 동지들 가운데 못 배운 이들에겐 일자리도 만들어 줘야 하는데, 식당 하면 밥이라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테니. 이문 나면 희생당한 이들도 보살필 수 있을 거고. 내겐 동지들 돌봐야 하는 게 미래혁명이고 미래정치다.” -돌아가면 버마학생민주전선을 정치조직으로 돌릴 생각인가? “무장조직은 해산하겠지만, 그렇다고 정치조직으로 가겠다는 건 아니다. 일상 속의 혁명 같은 걸 염두에 두는데, 이를테면 정치 감시투쟁 같은. 버마학생민주전선 깃발은 내리지 않겠다.” 오늘 버마 안팎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사람들은 섣불리 달라진 세상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 국경에서 테러리스트 오명까지 뒤집어쓴 채 그 민주화를 위해 무장투쟁을 벌여왔던 버마학생민주전선은 여전히 새로운 혁명을 꿈꾸고 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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